“다음 생이 있다면 무슨 나무로 태어날래?”
식사 시간에 뜬금없이 아빠가 던진 말이었다. 나는 버드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다. 연못이나 호수 근처에서 은은하게 가지를 흩날리는 버드나무가 아주 여유로워 보이고 품위 있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다. 버드나무처럼 봄바람에 살살 흔들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이며 오리 떼를 지켜보고 싶었다. 그 광경을 상상하고 있는데 엄마가 자기는 물로 태어나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물로 태어나서 온갖 곳을 데굴데굴 흘러 다니며 온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다. 질문한 당사자인 아빠는 은행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다. 천 년을 산다고 하는 은행나무가 되어 오백 년이고 천 년이고 인간들이 어떤 꼴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굽어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동생은 나무로 태어날 바엔 차라리 안 태어나고 만다며 단번에 선을 그었다. 모두 너무나 각자의 개성 대로인 바람이었다.
언젠가 태어나는 걸 선택할 수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걸 택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대답에 아빠는 그래도 태어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것도 보며 사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다. 그 말에 ‘어차피 안 태어나면 아무것도 모를 텐데 좋고말고가 있을까.’하고 답하자 아빠가 곧 수긍했다. 그러면서 지금 같은 세월이었다면 자식을 낳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너무 없는 형편에 자식을 낳아서 내내 일만 하느라 어릴 때 놀아주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같은 얘기를 어쩌다 다른 곳에서 한 적이 있었다. 나의 말을 들은 P는 뜬금없이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니 네가 사라지면 너무 많은 사람이 슬퍼할 거야.”라는 말을 했다. 택할 수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걸 선택하겠다는 얘기와는 어딘가 초점이 안 맞는 대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말이 지닌 무게감에 마음이 파랗게 젖어 들어갔다. 내 목숨의 무게는 한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어서 그들이 나를 중력처럼 지상으로 꽉 눌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머릿기름을 발라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둥글게 만 머리에 비녀를 꽂는 옛날 사람이어서, 장례도 옛날식으로 했다. 할머니는 평생 살았던 동네의 언덕에 묻혔다. 상여를 따라 언덕길을 올라가는 동안에도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아계셨던 우리 할매의 죽음을 믿지 못했다. 병원으로 가는 차창 너머로 나를 따라 손을 흔들던 모습, 힘이 없어 앉은 채 옆으로 쓰러지면서도 손녀가 빨대를 꽂아 받쳐 든 두유를 빨아 잡수시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사실 할매와 나는 별 이렇다 할 깊은 교감을 나눈 적이 없었다. 아마도 1918년쯤에 태어났을 할매의 옛날식 경상도 사투리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데다 할머니가 딱히 나를 특별히 아꼈던 것도 아니어서 우리 사이는 그저 같이 밥 먹고, 자고 가끔 장난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죽 할매는 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때까지 계속 살아 계실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볼 틈도 없었다. 그런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하니 도무지 믿기지 않아 장례식 내내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장례식장 육개장은 어찌 그리도 맛이 있으며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은 또 어찌나 반갑던지.
삽으로 흙을 푸기를 얼마간, 곧 흰 천 같은 것으로 둘둘 싸인 실루엣이 나타나자 비로소 진실이 드러났다. 두꺼운 천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익숙한 모양새였다. 그 이후의 일은 눈물에 가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어른의 말씀에 의하면 할매는 돌아가시기 전에 죽 한 그릇을 다 비우셨기 때문에 저승길 잘 가실 거라고 했다. 게다가 장례를 치르는 날 나뭇가지에 학 여러 마리가 앉아 우리를 바라봤다고 하니 필히 할매가 자손들을 지켜주실 거라고 했다. 난 그다지 낭만적인 인간이 못되어 그 말을 죄다 믿지는 않았지만 학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던 것만큼은 진실이라 여겨서 그들이 왜 하필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을까 궁금해했다. 이 모든 게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도 아니면 정말로 할매의 영혼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수명은 38년이라고 한다. 숲땃쥐가 2.1년, 북극고래가 200년 이상 사는 걸 생각하면 이 두 동물의 수명 차이가 극과 극인 것을 고려하더라도 그 중간 어디 즈음에도 못 끼는 인간의 수명은 다소 짧아 보인다. 번식기를 10대 중반부터라고 본다면 자기 자식이 첫 아이를 낳을 때쯤 죽게 되는 것이 인간의 삶이었던 셈이다. DNA에 새겨진 본능대로 자식을 낳고, 그가 아기를 낳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키우다가 손자를 볼 때쯤 죽는 삶이란 어땠을까. 자식을 낳음으로써 할 일을 다 했으니 만족스러웠을까, 아니면 이제야 조금 세상을 알 것 같은데 죽게 되어 무한히 아쉬웠을까.
인간의 자연수명으로 따지면 나에게는 앞으로 7년의 시간이 남았다. 하루하루 체감되는 정도로 보아할 때 이 7년은 빛의 속도로 흘러갈 것이다. 그때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벚나무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듯 여유롭게 살고 있을까,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굽어볼 학들의 은혜를 느낄 틈도 없이 마냥 바쁘게 살고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 나이가 되어 ‘만약 내가 올해 죽는다면’을 가정했을 때 하고 싶은 걸 다 하지 못해 무한히 아쉽기만 할지, 행복했던 삶의 슬픈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그 옛날 자연수명대로 살았을 인류는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을까. 할매는 정말로 학이 되어 우리를 찾아왔던 걸까. 7년 후에도 우리 강아지가 살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