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에게는 놀이터, 아빠에게는 인생의 근력
봉천동 새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를 졸랐다.
"엄마~우리도 지윤이네처럼 거실에 소파 놓으면 안 돼? 나도 소파에 앉고 싶어!"
"아빠랑 이야기 나눠보고 소파를 살 예정이니까 가만히 좀 있어!"
하지만 이사를 하고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우리 집 거실은 덩그러니 아무것도 없이 휑한 채로 남겨져 있었다.
당시 부잣집의 상징은 거실의 소파와 주방의 식탁, 그리고 아이들 방에 침대였다. 그런데 이사를 오고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우리 집에는 없었다. 나는 단독주택으로 이사가게 되면 나만의 멋진 방을 갖고 싶어서 종이 위에 방의 도면을 그리고 그 위에 내가 갖고 싶은 가구를 배치하는 놀이를 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바람은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아빠가 말싸움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릴 때 주로 아빠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편이었고 엄마는 단단히 화가 나서 아빠를 추궁하는 식의 부부싸움이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아빠가 엄마의 허락 없이 몰래 대형 운동기구를 산 것이었다.
"아니~~~ 거실에 그 큰 운동기구를 왜 놓느냐고~~~ 그런 몸집 큰걸 사면서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어요 당신은?"
".. 다 내가 생각이 있어서 그래!!"
둘의 실랑이는 끝이 날줄을 몰랐다.
그나저나 '운동기구'? 대체 어떤 걸 말하는 걸까?
다음 날 아침, 집 앞에 큰 용달차가 도착하여 거대한 스테인리스 봉들과 기구들이 조립이 안된 채 배송되었다.
'아니 ~~아빠는 대체 저딴걸 왜 거실에 놓으려고 하는거지?정말 짜증나!!'
나는 속으로 화가 난 엄마를 두둔하고 있었다.
어느새 두 명의 기사님이 하나의 동작조가 되어 말 그대로 '조이고 기름칠하며' 운동기구를 조립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내 눈에 완성된 그 거대한 운동기구는 정말 말도 안 되게 거실과는 일도 어울리지 않는 형태의 짐(zym)이었다.
엄마는 계속 화가 났는지 그 운동기구를 쳐다도 안 보시고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계셨다.
하지만 나와 내 동생들은 하나하나 운동기구를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전체적인 컬러는 블루계열로 총길이는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고 폭도 1미터 가까이 되는 말 그대로 거대한 운동센터가 우리 집 거실을 한가득 차지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라!80년대초에 어느 집에 이런 대형 짐이 있었겠는가? 가격은 말할 것도 없이 비쌌을 것이고 공간 활용성도 현저히 떨어지는 그런 애물단지가 따로 없어 보였다.
하지만 쌍둥이 동생들은 신이 나서 마치 놀이터에 놀러 온 아이들처럼 운동기구의 장비들을 직접 만져보고 시도해 보였다.
먼저 왼쪽 끝에는 속도를 설정해서 탈수 있는 자전거가 있었고, 자전거 양옆에는 허리를 돌릴 수 있는 회전판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이단 철봉이 이어졌는데 제법 튼튼해서 우리가 모두 매달려도 끄떡없었다.
나도 처음에는 이 운동기구가 꼴도 보기 싫었는데 놀이터가 멀었던 우리 세 자매에게는 완벽한 놀이터가 되어 주는 게 무척이나 신이 났다.
예컨대 내가 앞에서 마차를 끄는 시늉을 하며 자전거를 굴리면 동생들은 온갖 살림살이를 잔뜩 넣은 이동식 마차의 주인이 되어 어디론가 여행을 하는 그런 놀이들을 하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역기를 들 수 있도록 벤치가 놓여 있었는데 그 벤치는 경사도를 맞추면 또 하나의 미끄럼틀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와~~~ 우리 집에 진짜 멋진 놀이터가 생겼다!!"
"친구들 데리고 와서 놀아야지~~~"
우리 셋은 미끄럼틀을 타기도 하고 철봉도 하고 자전거도 열심히 타며 이른바 '체력단련'을 하였다.
여기서 우리 아빠를 잠깐 소개하자면, 아빠는 키가 매우 작으시지만 몸은 정말 탄탄하시다.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미스터 코리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몸을 키우신 사진도 있다. 아마도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해 열심히 몸을 키웠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니 이런 운동기구도 아빠의 눈에 쏙 들어왔던 게 아닐까? 물론 내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빠는 그 운동기구에서 제대로 운동을 하셨던 기억이 거의 없긴 하다. 하지만 마치 헬스 정기 등록권 1년 치를 끊어놓은 것과 같은 든든함이 아빠 마음속에는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몇 번 놀다 보니 운동기구는 우리에게도 더 이상 특별한 놀이터가 되어 주지 못했다. 그 넓은 거실을 가득 자리하고 있던 운동기구는 엄마가 이불 빨래를 해서 널어놓기에 제격이었고 이사 가기 전에는 여기저기 고장이 나서 삐걱거리고 나사도 빠져서 더 이상 몸집이 커진 우리가 올라앉기도 불안한 지경에 이르렀다.
몇 년 후 철산동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거대한 로봇과도 같던 그 운동기구는 분해되어 어느 고물상에게 팔아 넘겨졌다.
하지만 4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우리 집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운동기구의 색깔과 구성품들은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빠~~ 몸이 아주 좋아지셨네?"
"응~~ 나 요즘 헬스 하잖아~~ 어떠냐! 허벅지랑 팔뚝 탄탄하지?"
아버지는 얼마 전 무릎의 인공관절을 넣는 수술을 하셨는데 워낙에 근력운동을 꾸준히 해오셔서 다리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아기같이 웃는 얼굴의 아버지를 아무도 80의 노인으로 보지 않는다. 부유하고 풍족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지금 80의 나이에도 늘 무언가를 배우고 시도하며 도전하는 아빠는 나에게 '노년의 건강'이라는 최고의 유산을 남겨주고 계시다.
"아빠~혹시 그 옛날 그 거실에 들여놓은 운동기구 기억나?"
"그럼~기억나지! 너희가 거기서 내려오질 않았잖아~니들이 정말 좋아했지?"
아빠의 기억 속에 그 운동기구는 자신의 체력단련기구가 아니라 딸들이 신이나라 좋아하던 놀이터로 남아있나 보다.
아빠~지금도 건강하시지만 앞으로도 건강하신 체력과 정신으로 내 곁에 오래오래 남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