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창백한 언덕의 풍경
이 책을 빠져들듯이 읽고나서 고민에 빠졌다. 원래 쓰는데 더 많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도무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적이지만 살아있는 영국 전원주택과 폭격이 있었던 나가사키 동편의 나카가와 구역을 오가는 과거와 시대의 교차에 대해 얘기할지, 아니면 사치코와 에츠코의 역설에 대해 얘기할지, 아니면 잔잔한 이야기에 감도는 긴장감과 한 번씩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섬뜩함에 대해서 얘기해야할지 말이다.
이 책은 자살한 딸 게이코에서 시작되는 에츠코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고록이다. 결국 에츠코의 꿈에 나오는 소녀는 처음엔 분명 게이코라는 생각이 들지만 일본 살던 시절 이웃인 사치코의 딸 마리코가 되기도, 사치코, 아니면 심지어 둘째 딸 니키, 또는 화자 자신이 되기도 한다.
에츠코가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가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 때문이었다면 소설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초혼한 일본인 남편과의 이혼을, 재혼한 영국인 남편과 영국으로의 이주를, 첫 딸 케이코가 방문을 닫아버렸을 때 무엇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면 에츠코의 인생에 남아있는 부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의 모순을 직면하여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삶에는 전쟁의 폐해와 이주한 이방인의 외로운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나에게 지난 2년은 내가 내린 결정들에 대해 가장 많은 후회를 했던 시간이었다. 대단한 인생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다시 시작하는 공부에서 무슨 과목을 선택할지, 그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하는 고민들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다시하게 되면서 이미 10년 전과 동일한 고민을 확신에 차 있을줄 알았던 나이에 또 하게 되어 초조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고민들도 결정을 번복하는 나를 보며 지난 세월 동안 도대체 그동안 발전한 점이 하나도 없는지 의구심이 생겼다. 단지 그럴만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뿐이고., 나는 원래 불안정한 사람이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수강 신청을 10번 넘게 등록과 철회를 반복하고 나서야 가장 완벽한 결정을 내린답시고 정작 중요한 방향성을 놓쳐버린 나를 발견했다. 그럼에도 새롭게 얻은 지식과 경험이 있었고 나름 의미가 있는 한 학기를 보낸건 절대 미리 예측할 수 있던 부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멀리 돌이켜 보니 잘풀렸던 일들은 내가 마지막까지 이 길이 맞는지 초조해했던 선택지이거나 심지어 내가 선택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졌던 일들이 태반이다.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해 확신이 적어진 대신 받아들이는 자세가 생겼지만 아직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륜은 부족한 나이. 그래도 때로는 어떤 자이적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인생이 차곡차곡 쌓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에츠코의 덤덤한듯 여전히 과거에 머무른 듯한 회고를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이제 그런 일들은 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