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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손락천 Jan 25. 2017

아침

짧은 생각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창한 가을로부터 추방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피곤했던지 꿈 한번 꿔보지 못하고 아침을 맞았다. 찌뿌둥한 몸을 안고 힘겨이 일어나 양치질을 했고, 세면과 함께 면도를 했다. 베란다 밖은 쌀뜨물 같은 여명이 아직 이른 아침임을 알린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라는 상투적인 물음이 오늘도 여상스러운 날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하지만 출근을 위해 밖을 나서고 보니 햇살이 눈부시다.


  10월에 걸맞은 바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햇살의 따사로움.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설레도록 하는 화창한 아침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창한 가을로부터 추방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슬퍼지려 하는 것을 애써 참고 길을 걸었다. 문득 마주칠 지인이나, 그저 기분이 좋아 손 흔드는 이름 모를 꼬맹이들이라도 있으면 마음껏 미소 지어 줄 용의가 있다. 그러나 역시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내 생활의 좁음이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 깜냥이 그만큼 뿐이어서, 넓고 깊은 삶을 살기엔 무리인 것을.


  그러던 중 조우한 것이 박범신이었고, ‘비우니 향기롭다’였다.



박범신은 “나는 평생 주기적으로 ‘혁명’을 꿈꾸었다”는 말로 서문을 열었다.



  나는 속도를 조절하며 출․퇴근의 짬을 오롯이 한 권의 책에 쏟았다. 그리고 작지만 여전히 꿈틀거리며 살아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숨소리를 들었다. 아니 들었다고 생각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나는 그냥 그렇게 믿고 싶고, 또 그렇게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행복일 것이기 때문이다.


  박범신은 히말라야와 관련된 소설을 쓰다가 히말라야로 가게 된다. 머릿속에 있는 타협적이고 갑갑한 세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였을 테다.


  먹고살기 위한 비겁함에서 한 발자국 빗겨 나게 되면,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을 구별하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기뻐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역시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아니. 현실이 그러하지 않다기보다는 현실을 다르게 해석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박범신은 “나는 평생 주기적으로 ‘혁명’을 꿈꾸었다”는 말로 서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을 일컬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나 습관의 축적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느끼는 일상 속의 나를 통째로 뒤집어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답다. 일상은 언제나 쫒기 듯 빠르고 분주하게 흘러가지만, 그것은 그냥 일상일 뿐, 그것이 ‘나’일 수는  고, 그것이 ‘나’를 구속할 수도 없다. 단지 왠지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듯한 어조의 성질 사나운 협박일 뿐이다.  



작은 일탈이나 여행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법의 반을 이룬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그는 히말라야의 어느 길목에서 자신이 살아온 경로를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망이 팽창하고 있는 카트만두 뒷골목에서 나는 삼십 대, 욕망을 향해 분주하게 달려가던 나를 만났고, 두클라나 남체바자르에서 나는 존재론적 번뇌에 싸여 보냈던 나의 이십 대를 만났으며, 탕보체, 팡보체, 딩보체 마을을 차례로 지나쳐온 비좁은 고원길에선 끝간 데 없이 더 먼 곳을 그리워했던 나의 외로운 십 대를 만났고, 마침내 로부제를 거쳐 칼라파타르까지 갈 때 내 영혼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리하여 그는 ‘혁명’을 이루었을까? 과연 현대인이 경배하는 물질과 욕망의 신으로부터 자유했을까? 티베트 불교의 성자 밀레르파는 '길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법의 절반은 이룬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신의 세계, 겸허한 세계를 알게 해 줄 히말라야는 우리에게서 멀지만, 작은 일탈이나 여행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법의 반을 이룬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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