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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손락천 Mar 29. 2017

봄, 노래, 그리고 시

나와 상관없이 온 봄이라면, 그러한 봄은 나의 봄이 아니다.

그래서 가끔씩 생각한다. 노래처럼 울림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고.



  노래 듣기를 좋아한다. 가사와 멜로디 그리고 목소리의 향연은 거부할 수 없는 취기. 


  맨 눈으로 본다면 비문의 가사일지라도 한 소절 한 소절이 멜로디에 녹으면 띄엄띄엄 구멍 난 가사 사이가 함축된 정서로 채워지고, 어느 순간 비문은 시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좋은 목소리를 얹어 놓으면, 시는 다시 더 없는 공감의 울림이 되고, 몸은 노래에 허덕인다. 그래서 가끔 생각한다. 노래처럼 울림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고. 



그러나 노래는 노래고 시는 시다.



  하지만, 가사는 그 자체로는 시가 아니고, 좋은 멜로디와 목소리를 만나야만, 비로소 시와 같은 생명력을 가진다.


  비록 시 역시 운율을 가지지만, 시는 비문이 아니고, 그러하기에 노래처럼 비문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현란한 날숨과 들숨으로 구성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의 호흡에 그칠 뿐이다.  이렇게 시가 주는 울림과 노래가 주는 울림은 서로 다른 것이다.


  노래가 주는 울림이 심상 내면의 중첩된 거울에 겹겹이 반사되어 자아낸 막연한 감성이라면, 시가 주는 울림은 매우 뚜렷한 심상이 특정한 마음 바닥에 박히어 자근자근한 아픔으로 소환한 감성인 것이다.


  즉, 시는 노래와는 달리 특정된 마음 상태에 대한 침투인 것이고, 특정된 마음 상태를 상처 내어 내면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문인과 예인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던 것일 테다.


  물론 지금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예인을 문인처럼 대하여 그 경계를 뭉뚱그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함께 뭉뚱그릴 것이 아니다.        





옳은 것이 항상 옳은 것일 수는 없다. 어쩌면 사람은 상상한 것과 꿈꾼 것을 위하여 과학적 지식을 쌓았지만, 결국은 그 쌓은 지식으로 상상과 꿈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봄이 다가온다. 햇살이 따스해지고, 한 줄기 비에도 온기가 묻어난다. 그만큼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었고, 그 상태에서 공전을 한 까닭일 테다.


  그러나 계절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고서는 삶의 맛이 있을 리 없다. 사람은 꿈꾸는 존재인데, 그러한 태도에는 상상도 꿈도 없기 때문이다.


  옳은 것이 항상 옳은 것일 수는 없다. 어쩌면 사람은 상상한 것과 꿈꾼 것을 위하여 과학적 지식을 쌓았지만, 결국은 그 쌓은 지식으로 상상과 꿈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은 대척의 관계에서 서로를 거부하고, 사람은 그 긴장관계에서 삶의 의미와 이유를 얻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무미건조한 지식은 삶의 의미와 이유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봄이 왔지만, 나와 상관없이, 나에게 아무런 메시지가 없이 온 봄이라면, 그러한 봄은 나의 봄일 수가 없다.



  현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느 순간 ‘왜?’라는 물음에서 ‘그게 뭐?’라는 물음으로 바뀌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의 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필요할 뿐인 상태가 되어 버렸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것에 근본이 된 사상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 범위 내에서는 합리적인 설득이 가능하다. 그러나 선택된 행위에 근본이 된 사상이 부재하면 그것이 결론적으로는 선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악한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어느 것이든 합리적인 설득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봄이 왔지만, 봄은 나와 상관없이, 나에게 아무런 메시지가 없이 온 것일 뿐이어서, 나는 다만 봄이라서가 아니라 날이 좋아서 유쾌한 일을 할 수도 있고, 패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詩의 근간은 ‘회복’, 잃어버린 상상과 꿈의 재건이다.



  시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예전에는 어떠하였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제 시의 근간은 ‘회복’, 잃어버린 상상과 꿈의 재건이 되어야 한다. 


  문학적으로 봄은 무엇일까. 또 봄은 어떻게 온 것이고,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내게 봄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일까.


  시는 나와 외부 세계의 관계를 설정하고 그 사이의 의미를 사유하는 작업이다. 막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계에서 이유 있게 사는 것을 고찰하는 수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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