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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손락천 May 02. 2017

부질없다

산다는 것

숙명이라는 이름의 부질없음이 깨어질 때.



 부질없다.


 부질없다는 것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한다거나 욕심을 내어 얻더라도 근본적인 욕심을 채우지는 못하리란 뉘앙스가 강하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욕심만으로도 엄중한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적 욕심은 더욱 엄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사람으로 사는 한 근본적인 욕심은 없을 수 없고, 그러하기에 특별한 돌파구가 없는 한 사람의 삶은 부질없다는 자조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사람은 부질없음에서 해방될 도구로서 종교나 진리에 심취하기도 하고, 득도에 열을 올리기도 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러한 심취와 구도만이 돌파구인 것은 아니다. 작은 얻음에도 자족하는 삶의 태도라면 숙명으로서의 부질없음은 그 의미의 힘을 오롯이 잃게 된다.


 왜냐하면 부질없음이 끝없는 도달 욕구를 전제로 한 것인 이상, 그 욕구에 대한 자족적 중단 내지 미완의 허용은 그 자체가 바로 부질없음의 메커니즘을 치명적으로 타격하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족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항상 자족하기를 원하지만 자족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지만 자족이 부질없음이라는 숙명을 무력화할 비기라면 자족은 숙명만큼이나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어려움일 것이 당연하리라.


 숙명을 그대로 따르는 것과 숙명을 거스르는 것, 이 중 무엇이 옳을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그와 같은 길에 순응하는 것이 법이다. 그러나 사람 속의 깊은 숙명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고, 그러하기에 부질없음이라 칭하여진 것이니, 숙명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닐 것이다.



숙명. 낭만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으리라.



 사람이니 사람에게 당연한 숙명일진대, 그것을 거스름이 또다시 옳은 일일 것이라니 했으니 이러한 아이러니가 없다. 그래 어쩌면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못되었다고 해도 우선은 그 길을 걸을 것이다. 어리석음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어리석음 역시 사람의 숙명이기에.



 다만,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낭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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