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4평등 사회, 민주국가 디자인 (하)
안창호는 서울에 도착하여 김병찬이 마련해 준 삼각정 중앙호텔(김병찬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광주, 순천, 부산, 대구, 안동 등을 순회했다. 인민들의 생활상은 예전 신민회 때의 상황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거늘, 일제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려 왔을 인민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안창호는 영호남 지방 순회에 이어, 3월 1일부터는 경기도를 출발해 개성, 오산, 정주, 선천, 신의주 등 평북 지역을 순회하였다. 이광수, 김지간, 김병연, 김동원 등 흥사단 동지들이 따라나섰다. 검단산에 있는 유길준 묘소를 찾아가 참배했고, 오산에서는 이승훈 묘소를 참배했다. 그리고 고향 강서에서는 필대은 묘소를 찾아가 참배했다.
안창호가 가는 곳마다 인파가 몰렸고 군중은 ‘한 말씀’을 부탁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감시가 심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형기만료 이후 안창호는 다시 2차 국토순례에 나섰다. ‘조국 땅에 이상촌을 건설하자.’ 이러한 결심이 서자, 이듬해 1936년 2월 입춘이 지난 무렵 구체적인 이상촌 계획을 품고 동아일보사 서무부장 김철중과 함께 대전, 이리, 군산, 김제, 광주, 목포, 순천, 여수, 하동, 진주, 마산, 대구 등을 순회하며 영세민들의 생활상을 꼼꼼하게 살폈다. 안창호는 이상촌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35년 3월 중순, 1차 국토순례를 마친 안창호는 평양 대동강변 대보산 자락에 있는 조신성의 별장에서 지냈다. 별장 근처에는 고구려 시대의 유적지인 송태사가 있었는데, 천년 역사를 지닌 파손된 석탑과 묵은 석재건축, 고분벽화 등이 남아 있었다. 200년 전 고구려 전성기에 평양의 인구는 100만 명이었고, 대동강 운하를 개간하여 당나라 상선이 평양을 오고 가면서 유교와 불교 문화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송태사는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신라의 김유신 등이 수련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안창호는 폐허가 된 송태사 유적을 다시 찾은 기쁨에 산자락에 집을 짓기로 했다. 대성학교 제자들과 평양유지들이 성금을 모았다. 안창호는 대지 50평에 건평 18평의 집을 손수 설계하고 일꾼들과 함께 집을 지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자연 정원에, 조선기와로 덮인 동서양식의 실내환경이 어우러진 이상적인 농촌주택이었다. 안창호는 이 집의 이름을 <서벽사>라고 지었다. 그리고 입구에 <빙그레>라는 문패를 달았다. 역사의 복원. 안창호는 이곳을 흥사단 동맹수련의 장으로 활용할 생각에 기뻤다.
안창호는 가끔 서울을 드나들며 귀국해 있는 동지들과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치안유지법으로 체포 압송되어 3년여 감옥생활을 마치고 국내 일상으로 복귀한 이들이었다.
하루는 북경파 원세훈을 만났다. 원세훈(1887~1959)은 신채호 구출 운동을 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의주 형무소에서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안창호는 원세훈을 통해 이회영과 신채호의 소식을 들었다. 이회영(1867~1932) 선생은 신민회 동지로 서간도 기지개척의 선구자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정부가 난항을 거듭하자 신채호와 함께 북경으로 갔다. 그곳에서 무정부주의로 선회하여 선봉에 섰다. 이회영 선생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상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의장에 추대되었다.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이회영은 ‘젊은이가 희생되는데 늙은이 몸을 아껴 무엇하랴’라는 심정으로 만주 연락 거점 확보와 지하공작망 조직을 위한 행동대장으로 나섰다. 1932년 11월 이회영은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일본군사령관 암살 계획을 품고 길을 나섰다가 대련 경찰서에서 체포되었다. 친형 이석영의 둘째 아들 이규서와 엄항섭의 처남 연충렬이 기밀을 밀정에게 누설하여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의 원한을 샀다. 이회영은 4일 동안 놈들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죽도록 맞고 실신하여 여순 감옥으로 이관되자 1932년 11월 17일 그곳에서 바로 옥사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안창호는 머리 숙여 이회영 선생을 추모했다.
신채호의 소식 역시 안창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마음 한구석에 쌓여있던 그리움이 통증이 되어 밀려왔다. 1926년 12월 말경, 북경에서 보았을 때가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때 신채호는 자유, 평등, 폭력, 혁명을 예찬하면서 이회영 선생을 뒤따라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에 나서겠노라고 했다.
신채호는 자금 확보를 위해 외국위체위조사건에 연루되었다. 1927년 위조지폐 1차 운송 작전에 성공한 신채호는 1928년 5월, 2차 작전을 위해 대만 지룽 항에 도착했다. 일제는 지룽 우체국에서 매복해 있다가 신채호를 체포했다. 신채호는 곧바로 대련으로 이송, 1930년 5월에 최종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옥중투쟁을 하다가 1936년 5월 뇌일혈로 생을 마감한다.
안창호는 신채호의 옥중투쟁 소식을 듣고 결국 눈시울이 젖었다. 젊은 날 신민회와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만났던 신채호가 그리웠다.
원세훈은 망명을 계속 시도하고 있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해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창호도 같이 망명함이 어떤가 하고 물었다. 안창호는 고개를 저었다. 원세훈은 출소 이후, 의주 감옥에 갇힌 이유필을 면회한 일이 있었다. 의주와 압록강 맞은편 안동에는 이유필을 따르는 한국 청년들이 많이 있었다. 이유필(1885~1945)은 홍구공원 의거 이후 피신 중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당 대표로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완성했고, 1933년 3월 6일 항주 임시정부 국무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항간에 떠도는 이유필의 일본 귀순 소문으로 인해 국무원에서 파면되고 따돌림을 당했다. 이에 대해 의주와 안동 청년들 생각으로는 이유필을 견제해 온 임정 세력의 고의성이 의심된다고 했다. 이유필은 1933년 3월 9일, 결국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일본은 무슨 음모에서인지 이유필을 임시로 석방했다. 이 일로 인해 이유필의 친일 전향 소문은 상해에 살고 있던 가족에게도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었다. 이유필을 따르던 청년들은 일제가 이유필을 나가사키로 호송한 데는 이유필의 전향 소문을 통해서 한국 독립운동 진영을 분열, 소멸시키고자 하는 음모라고 했다. 이유필은 나가사키에서 다시 체포되어 신의주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유필은 1933년 12월 15일 치안유지법 위반 3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이라고 했다. 안창호는 이 소식을 듣고 일본 공작 정치에 치를 떨었다. ‘아, 대한의 동지들이여, 동지들끼리는 믿고 속아야 한다.’ 안창호는 순간, 한국노병회 일로 김구와 티격태격하던 이유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춘산은 조소앙, 김철하고도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 춘산은 이유필의 아호다. 안창호는 신의주로 가서 이유필을 면회하고 싶었다.
이유필은 1936년 3월 23일, 3년 만기로 출소했다. 6월 5일, 이유필은 송태산 서벽사로 안창호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상봉하고 회포를 풀었다.
이유필은 안창호의 권유에 따라 고향에 눌러있기로 했다. 의주에서 경제활동에 전념하면서 장차 새 한국 건설의 경제토대를 마련하자고 합의했다. 이유필은 1937년 고향 친지들이 모은 자본금으로 대동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제 독립운동의 기초를 마련했으나, 조선총독부의 훼방으로 경영난에 시달렸다. 해방 후 이유필은 평북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치안과 자치활동을 지도했다. 마침 1945년 11월 23일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오다가 11월 28일 황해도 청단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안창호는 가출옥 중인 1935년 9월 5일, 청년들의 안내를 받아 압록강 건너 안동현으로 갔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여 1932년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안동현은 일본 땅이 되어 있었다. 안동청년회는 안창호를 초청했고, 일제는 강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찬회로 집회 허가를 받았는데 만찬회 석상에 2천여 청중이 모였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입니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왜 자신이 그 인물 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입니까? 나는 최후로 국가 제일 민족 지상의 이념에서 내 나라를 부하게 하고 내 민족을 흥하게 함에는 민족 자본주의를 주장하며, 최근 사회혁명 사상에는 민족 평등, 정치 평등, 경제 평등, 교육 평등 이상 4대 평등인 대공주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합니다.”
안창호는 여운형의 말대로 대공주의의 목표와 청사진을 다듬어 나가기로 했다. 중국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일제는 수많은 조선 민중을 동원하고 있는 안창호의 경세론에 다시 긴장하고 있었다. 1935년 11월 18일, 안창호의 형기 만료를 앞두고 교회와 사회단체들의 강연 초청이 이어졌다.
평양에서는 11월 30일, 백선행기념관에서 도산 환영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백선행기념관은 여성 재산가 백선행(1848~)이 조만식과 뜻을 합해 1924~1929년에 평양시민 문화시설로 지은 대 공회당이었다. 오윤선 장로와 조만식은 환영 축제가 좌절되자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평양감리교회 연합예배를 개최하고 안창호를 초청하여 설교하게 하였다. 잇따라 신의주에서도 초청강연회가 이어졌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은 찬란한 역사가 있다. 현재 상황을 결코 비관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장래 운명은 국제정세의 여하에 결정될 것이다.> <일본이 오늘날과 같이 발전한 것은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교육과 산업, 군비를 충실히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갑오개혁 등 정치적 혁신 운동은 있었으나 국민의 각성과 혁신이 부족했다.>라고 지적하며 이제부터라도 다음 사항에 주력하자고 했다.
<첫째, 민중 지식의 향상을 위한 출판사업. 둘째, 모범농촌 건설과 직업학교를 세워 기술교육을 보급하는 일. 셋째, 체육장려와 공중보건 운동을 실행할 것.> 안창호는 특히 이 내용과 관련해 현재 침체되어 있는 동우회를 향해 <동우회 회관 건립과 유급 사무체계 확립, 신용조합이나 합자 또는 상조회 등의 경제조직을 수립하여 경제력을 증대시키자.>라고 독려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