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낙심마오 #10/10 마지막 이야기
10화. 낙심마오
10화. 낙심마오
일본은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수립했다. 내친걸음으로 상해를 점령하고자 했지만 홍구공원 사태로 인해 일단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1937년 7월, 일본은 계획해 왔던 대로 중국 본토 침략을 감행했다. 북경 남서부지역 노구교 부근에 중국군 29군과 일본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7일 밤, 실탄 사격 소리가 들렸고 이때 일본군 병사 한 사람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군은 이를 확대할 계획이 서 있지 않았으나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삼아 다음 날 새벽 노구교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7월 28일 북경을 점령하고 12월 13일 남경을 점령하면서 30만 대학살극으로 중국을 자극했다.
중일전쟁을 앞두고 국내에서 기독교계(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 청년들이 ‘멸망해 가는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의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국내 35개 지부에 배포한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총독부는 사건의 배후에 이용설, 정인과, 이대위, 주요한, 유형기 등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들이 활동하고 있는 흥사단 동우회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마침 조선총독부는 전시 체제를 정비할 목적으로 사건을 확대하여 6월 28일부터 흥사단 인사들을 잡아 들이기 시작했다. 송태산장에 머물고 있던 안창호를 비롯하여 서울, 평양, 선천, 안악 등지에서 동우회 회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변호사, 의사, 교육자, 목사, 상공인 등 181명이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되었다. 8월 6일, 안창호와 동지들은 동우회 해산을 강요받았으나 안창호의 의연함에 모두 힘을 냈다. 안창호는 8월 10일, 종로경찰서에 다시 유치되었다. 그리고 모욕적인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고 11월 1일,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안창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죽어가고 있었다. 12월 24일, 일제 검사는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를 사유로 안창호를 보석 출감시켜 재판소가 지정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게 했다. 이듬해 1938년 1월, 동우회 핵심 인물 42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최종 송치되었다.
병원도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여동생 신호의 아들 김순원과 이갑의 딸 이정희와 청년 박정호가 병원 수발을 들었다. 의사는 안창호의 병이 위장, 폐, 간, 기관지, 피부, 복막염, 치주염 등 7가지라고 했다. 매월 들어가는 입원치료비 110원은 미주 동지들의 송금과 국내 지인들의 성금으로 간신히 충당했다. 안창호는 동지들에게 감사했다.
하루는 선우훈이 병원으로 몰래 찾아왔다. 안창호는 흰 머리와 흰 수염에 극도로 수척해진 얼굴이었고, 혀가 말라 말을 더듬거렸다. 선우훈은 눈물을 쏟으며 안창호를 안아 일으키고는, 숟가락에 물을 떠서 안창호의 입술을 축이게 했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소.” 안창호가 토하듯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선우훈은 울었다. “선생님, 많이 힘드시지요?”
안창호가 선우훈을 어렴풋이 알아보았다. “오, 선우훈 동지가 아니오? 울지 마오. 어떻게 온 것이오? 경비가 삼엄하다고 들었는데... 다른 동지들은 어찌 되었소?”
“네, 선생님...! 잡혔던 사람들 대부분 증거가 없어 풀려났고, 선생님을 포함해 42명에게 치안유지법을 적용해서 1월에 검찰로 송치했습니다.” 선우훈은 계속 울먹이며 말을 더듬었다.
“안타깝소.... 나 때문이오. 내가 일어날 수 있었는데.... 종로서가 나를 죽일 작정이었던 게요.... 내가 모두에게 죄를 지었소.... 탈출하자고 할 때도 마다하고 내 안위만 생각했었소.” 안창호는 동우회 사건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선생님, 아닙니다.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셔서 저희에게 힘을 주셔야지요, 선생님...!”
“훈 동지,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지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또 마음이 아프오....” 안창호는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말을 이었다.
“우리 동지들이 지금은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경제적으로 힘을 모아 미래를 준비하기 바라오.... 일본은 자기 힘으로 감당 못 할 큰 전쟁을 시작했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인하여 패망할 것이오.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인내하시오.”
“네...!”
“대보산에 내가 있던 산장은 그리 좋지는 못하나 주위에 심은 나무들이 매우 귀한 것이 많은데... 내 동지들이 나를 기념하기 위해 어떤 나무는 한 그루에 삼백 원까지 주고 사다가 심었지. 그러니 잘 보호해 주기 바라오.”
“네.” 선우훈은 울음을 참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또 산장 앞에 만든 운동장은... 과히 좁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돌을 옮겨 가며 만든 것이니... 앞으로 나무만 자라면 여름 한때 수양하는 처소가 될 것이오....”
“네에....”
“그리고... 그리고 말이오... 내가 죽은 후에 내 몸은 유상규 군 곁에 묻어주오.”
선우훈은 끝내 소리 내서 통곡했다.
운명을 앞두고 안창호는 인기척에 눈을 뜨기만 하면 사력을 다해 말했다.
“낙심마오.”
3월 10일. 안창호는 마지막 숨을 토하면서 장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 목인(睦仁, 무쓰히토)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국권을 빼앗은 일본 메이지 천황의 이름이다.
안창호의 운명 소식이 퍼져나가자 병원 밖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오열하면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반인은 일제 헌병과 경찰이 제재를 가해 접근할 수 없었다. 경비가 삼엄한 가운데 3월 12일 병원 영안실에서 기독교식으로 고별식이 치러졌다.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었다. 임종을 지킨 누이의 아들 김순원을 비롯하여 큰형 안치호와 조카 딸 안맥결, 누이 안신호 부부, 그리고 고향 지인 오윤선, 조만식, 김지간 등이 참석했다. 미국에 있는 유족에게는 전보로 부고를 보내면서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안창호의 당부였다. 안창호의 장례 소식이 퍼지자 동우회 동지들과 지인들은 감옥 안에서 또는 감옥 밖에서 오열했다.
해외 곳곳에서는 도산을 애도하는 성대한 추도식이 열렸다. 가장 먼저 3월 13일 중국 우한의 한커우 지구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주관으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김원봉, 김성숙, 유자명 등이 이끄는 좌파계열 4개 단체가 연합하여 1937년 남경에서 조직된 단체이다. 김성숙은 애도문에서 도산을 민족해방운동의 위대한 영수로 추앙했다. 그리고 “도산의 유지를 받들어 전 민족의 역량을 집중하여 반일통일전선운동을 구축하고 일제를 타도하자.”라는 애도사를 남겼다.
같은 날 하와이대한인국민회 주최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3월 20일, 한인 예배당에서 추모예배를 거행했다. 이승만은 「도산천고」라는 조시를 써 보냈다. <부인과 자녀들은 하늘가에서 슬피 울고 친한 동지들은 머언 외국땅에서 놀라도다. 나라는 망하고 있어야 할 사람 또한 떠나니 대동강(패강)과 더불어 슬픈 울음을 참기 어렵도다> 라는 내용이었다.
김구는 장사에서 3월 19일 자로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韓民』에 도산의 서거 소식을 호외로 알렸다.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1935년 11월 김구 주도로 항주에서 결성되어 정부 여당 기능을 하고 있었다.
4월 15일 장사에서 임시정부 주관으로 중국 각 관청과 각 사회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차리석은 소책자 『한국혁명영수 안도산선생 40년 혁명 분투사략』을 배포하였다.
이 책을 통해서 차리석은 도산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밝혔다. “선생의 혁명이론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었으며 민족 내부적으로는 반드시 사회민주정책의 일종인 체계적 방법을 건립함으로써 밖으로 세계대동으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선생은 민족적 역량으로서 원수 일본의 정복 세력을 분쇄하여 한국의 영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한 후에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을 기초로 하여 민주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혁명영수 도산 안창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 [도산 안창호, 사랑을 담다] 최종화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