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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May 17. 2023

제10장. 낙심마오 #7/10

7화. 이후 임시정부와 흥사단 동지들

7화. 이후 임시정부와 흥사단 동지들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본은 상해지역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박멸하려고 작정했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인사들은 상해를 떠나서 각 처로 피난했다. 흥사단 동지들도 상해를 떠나야 했다. 이들은 만주, 화북, 화남 등지로 흩어져 다음 길을 모색했다. 특히 중국혁명의 중심지인 광동 지역에는 김성숙과 김산을 비롯하여 안병무, 이육사, 안우생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 손문이 세운 중산대학이 있어 유학 중인 한국 청년들이 많이 있었다. 김붕준의 아들 김덕목과 두 딸인 효숙, 정숙을 비롯하여 송면수, 김창화, 구익균, 이정호, 김수 등이 중산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한국독립당 광주지부 결성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던 김붕준의 활약으로, 청년들은 중산대학과 황포군관학교로 진출했다. 김붕준(1988~1950)도 1933년에 중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한중동맹군에 참전하였다. 그의 아들 김덕목은 19살 나이로 윤봉길 의거 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김덕목은 1939년 황포군관학교(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사위원회 군령부 첩보학교 장교가 되었으며,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참모가 된다. 김붕준의 딸, 효숙과 정숙은 1936년과 1937년에 중산대학을 각각 졸업하고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한국혁명여성동맹, 광복군 총사령부와 임시정부 등에서 맹활약을 펼친다.

 

 안창호 체포 이후 흥사단은 미주 본부, 중국원동위원부, 국내지부를 망라하여 각처에서 흥사단주의로 정신을 무장하고 신성단결을 강화했다. 이들은 안창호의 유업인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이루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홍구공원 의거로 사정이 급변하자, 각 정당 조직체들도 경각심을 가지고 범 한국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서두르며 단결하기 시작했다. 1927년부터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던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일단 항주로 급히 이동했다. 현상금이 걸린 김구는 미국인 피치 목사 부부의 도움을 받아 가흥으로 피신했다. 중국인 항일운동가이며 재력가인 저보성이 김구의 피신을 도왔다. 저보성은 가흥 외곽 해염에 있는 며느리 집안의 별장을 김구의 피난 처소로 이용하도록 조치했다. 이동녕, 김의한, 박찬익, 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원들은 항주 장생로 호변촌으로 피난했다. 이후로도 항주 학사, 사흠방, 다시 청태여사 등지로 이동했다. 이들이 이동한 곳이 곧 임시정부 청사가 되었다. 혼란한 틈에도 국무령 이동녕은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기관지 『진광』을 발행했다. 임시정부는 그렇게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항주에 존속해 있었다.


 마침내 1932년 10월 25일 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한국혁명당(흥사단원동위원부 직속), 조선혁명당(현익철), 의열단(김원봉), 신한독립당(배천택), 대한독립당(박용태), 상해 교민단, 애국부인회, 미주대한인국민회 등 범 민족진영으로 구성된 정당들이 참여하였다. 1933년에는 재미 단체인 재미대한독립당, 대한민족총회, 뉴욕대한인교민단, 하와이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도 대일전선통일동맹에 가세했다. 

 대일전선통일동맹은 1932년 11월 2일, 중국 측과 항일 공동전선인 한중민중대동맹으로 발전되었다. 한중합작 항일조직의 탄생은 안창호의 통합 강조와 그 필요성에 대해 양국이 보낸 절대적인 지지와 공감의 결과였다. 


 그런 가운데 1932년 10월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가 남경에 설립되었다. 김원봉의 노력으로 전위혁명가를 양성하기 위해 국민당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김원봉, 이영준, 박건웅, 권중환, 윤세주, 신영삼(신악) 등 의열단 간부들이 교관을 맡아 1935년 9월까지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35년 7월, 의열단이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면서 간부학교도 해체되었다. 한국독립당도 민족혁명당 결성을 위해 일단 해체를 선언하고 신한독립당(배천택), 의열단(김원봉), 조선혁명당(현익철), 대한독립당(박용태)과 통합하여 1935년 7월 5개 정당이 통합된 민족혁명당으로 거듭났다. 민족혁명당 중앙위원은 지청천, 최동오, 유동열, 이광제, 박창세, 양기탁, 현익철, 김학규, 이운한이었고, 이들 중 중앙상무위원에 지청천, 최동오, 박창세, 이광제, 강창제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5당 통합은 김원봉 계가 임시정부 폐지론을 들고나오자 다시 분열되었다. 박창세, 양우조, 송병조, 문일민 등 흥사단 계는 1935년 9월 25일 조소앙, 조시원, 조시제, 홍진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김구는 11월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여 임시정부 옹호 노선을 선포하고 후방교란, 요인 처단 등 특무공작을 위해 산하에 청년단을 조직했다. 이동녕, 조완구, 차리석, 조성환, 송병조, 김붕준, 안공근, 엄항섭, 이시영, 양우조가 이에 소속되었다. 

 임시정부는 1935년 11월, 진강으로 이동하여 1937년 11월까지 있게 된다. 

     

 한편, 중국국민당은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의 쿠데타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부 중국에서 장쉐량의 동북군이 일본 관동군에 밀리고 있을 때,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명령하느라 서안으로 왔다. 장쉐량은 고뇌 끝에 명령을 어기고 장제스를 체포 연금했다. 그리고 항일전을 위해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즉각 주은래를 서안에 파견하여 평화적 해결을 도모했다.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편제되어 항일전을 펼쳤다. 

 이때부터 임시정부도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당면문제 협의와 정보교환의 편의성 등 한중합작을 도모했다. 김구는 장제스와 필담으로 면담하고, 낙양군관학교에 한국 청년들을 입교시키는 데 합의했다. 이때 지청천, 이범석을 교관으로 하여 애국청년 100여 명을 입교시켰다. 김구는 1937년 2월 한국청년전위단을 조직했다. 


 한국독립당은 1937년 8월 우익단체연합을 결성했다. 민족혁명당이 김원봉 계의 이탈로 분열된 이후, 1937년 4월 양기탁, 유동열, 지청천, 현익철, 강창제, 최동오, 김학규, 황학수, 조경한, 이복원 등은 조선혁명당을 재창당했다. 김원봉 계는 1937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총서기로 김원봉을 선임하였다. 12월, 김원봉은 남경에서 김규광, 최창익, 유자명 등 민족주의 좌파계열 4개 단체와 항일민족연합전선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여기에는 흥사단 계 임득산, 최석순, 김홍서, 서상석 등이 소속되어 활동했다. 이 연맹은 1938년 10월 10일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한중민족연합전선을 구축하여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노구교에서 무력 충돌을 일으켜 중국에 선전포고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은 7월 28일 북경을, 12월 13일에는 남경까지 점령했다. 일본군은 남경에서 30만 명 대학살극을 자행했다. 국민당은 쫓기고 있었다. 

 1937년 11월, 임시정부는 국민당을 따라 장사로 이동했다. 임시정부는 장사 남목청에 1937년 11월부터 1938년 7월까지 8개월간 머물렀다. 1938년 5월 7일 장사 남목청 2층,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의 3당 통합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때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회의장에 난입한 이운한이 권총을 난사하여 김구가 중상을 입었다. 조선혁명당 소속 현익철이 숨졌고 유동열과 지청천도 가벼운 총상을 입었다. 현장에 있었던 강창제(조선혁명당)와 박창세(한국독립당)는 당사자 이운한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모두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운환은 조선혁명당에서 제명된 인사였다. 중상을 입었던 김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3당 통합은 결렬되었다.


 1938년 7월 임시정부는 다시 장사를 떠나 광주에서 3개월을 머물고, 유주로 이동했다가 1939년 5월에 다시 기강으로 이동했다. 임시정부는 기강에 머물 때 이동녕을 중심으로 정상화되었다. 이동녕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임시정부 조직과 임시의정원 체제를 확대, 정비해 나갔다. 조선혁명당과 재건한국독립당 인사들이 합류했다. 1939년 8월 17일 3당을 주축으로 총 7개 정당 단체 대표들이 7당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1939년 10월 25일, 한국광복군 창설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동녕은 폐렴이 재발하여 1940년 3월 13일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기강 산기슭에 안치했다.     


 1940년 5월 임시정부는 다시 중경으로 이전했다. 임시정부는 중경에서 3당(김구 한국국민당, 조소앙 한국독립당, 지청천 조선혁명당) 통합을 이루어, 1940년 9월 17일 신당을 창당하고 당명을 한국독립당으로 결정했다. 조소앙은 삼균주의로 정치 균등, 경제 균등, 교육 균등을 제시했다. 차리석은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사실상 1930년 1월에 상해에서 창당했던 옛 한국독립당 강령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안창호의 대공주의의 맥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제 임시정부의 이당치국 체제 수립을 위해 남아 있는 과제는 좌파계열과의 대통합이었다. 김원봉 계와의 통합을 놓고 중경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간에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었다. 김붕준, 송병조, 조완구, 이시영 등은 좌우 진영 설득에 나섰다. 설득에 앞장 선 김붕준과 송병조는 흥사단 사람이었다. 이 과정에서 임시의정원 의장 김붕준이 탄핵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후임 임시의정원 의장 송병조에 의해 마침내 1942년 10월 김원봉 계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재통합을 결정했다. 이로써 한국독립당은 좌우통합 유일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김원봉 계의 조선의용대를 흡수하여 좌우통합의 군사력으로 한국광복군을 재편성하고 임시정부를 주석제로 개헌하여 김구를 최고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당치국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1944년 5차 개헌을 통해 김구와 김규식이 각각 주석과 부주석으로 선출된다. 1947~1948년에는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흥사단 사람들은 임시정부 내외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차리석, 김붕준, 송병조, 양우조, 문일민, 유정우, 임득산, 최석순, 김홍서, 서상석, 고영선, 안원생 등. 이들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의 수호자들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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