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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May 24. 2023

제10장. 낙심마오 #9 (상)

9화. 4평등 사회, 민주국가 디자인 (상)

9화. 4평등 사회민주국가 디자인 (상)

     

 1935년 2월 10일 오후 1시 30분. 안창호는 주거 제한 및 요시찰을 전제로 대전 형무소에서 삼 년여 만에 가석방되었다. 안창호의 건강상태는 좋지 않았다. 김동원, 주요한, 박흥식, 여운형, 안맥결이 마중했다. 안창호는 이들과 대전역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3시 30분 대전역을 출발해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가회동에 있는 박흥식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서울역에는 언론계와 재계 유지 등 1백여 명이 환영을 나왔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안창호는 침묵했다. 

 다음날 안창호는 김동원과 평양으로 갔다. 26년 만에 찾게 된 고향이었다. 오윤선, 조만식, 김지간 등이 안창호를 영접했다. 오윤선(1878~1950)은 대동군 고평면 출신으로 안창호와 동갑이며 교회 장로였다. 안창호는 대성학교에서 안중근 의거 배후로 체포되었던 1909년 10월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평양역에는 환영인파로 4천여 군중이 몰려들었다. 안창호는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눈물이 쏟아졌다. 흐릿한 시야로 군중을 향해 말했다. 『동아일보(1935.2.13.일자)』는 이렇게 기사를 썼다. <26년 만에 고향 땅을 밟고 여러분을 대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이룬 일 없고 보잘것없은 사람을 보아 주시려 이처럼 나와 주셨으니 더욱 황공할 뿐입니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무슨 일에나 낙심하지 말고 나아가서 후일의 성공과 행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안창호는 김동원이 이끄는 대로 그의 집에서 유숙하고, 2월 14일 오전에 고향 동촌에 도착했다. 오윤선의 자동차로 시가지를 돌면서, 어머니의 묘소와 조상 묘소를 찾아가 분향하고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 황몽은은 1930년 12월 27일 83세 일기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창호는 큰형 치호와 집안 어르신들에게도 일일이 문안 인사를 했다. 

 고향에는 안창호가 설립한 신앙의 발상지 탄포리 교회가 있었다. 탄포리는 뱃사람들이 모여 사는 포구 마을이었다. 안창호는 언더우드 학당에서 세례를 받고 고향 집 사랑방에서 11인 신자들의 모임을 열고 탄포리 교회를 세웠다. 그것이 기양역 근처에 교회당을 짓게 된 동기가 되었다. 탄포리 교회는 이후 기양교회로 자리 잡음으로써 평양의 장대현 교회와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수많은 청년이 교회를 통해 계몽되고 개화되어 해외로 유학했으며,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정신으로 맥을 이어 나갔다. 안창호의 큰형 안치호는 기양교회의 장로였다. 오윤선과 조만식은 기양교회에 환영회 자리를 마련하고 안창호에게 설교를 부탁했다. 수백 명의 고향 사람들이 안창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기양교회로 몰려들었다.      


 2월 16일, 안창호는 다시 서울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평양역에서 여운형과 상봉했다. 여운형은 대전감옥 출소 때 잠시 얼굴을 마주했으나 대화를 나눌 틈이 없었다. 여운형이 영동지방으로 출장이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영동지방 출장에서 돌아와 평양역에서 안창호를 기다리고 있었고, 안창호는 오후 열차 편으로 서울로 가기 위해 평양역에 나타났다. 오윤선, 조만식이 안창호를 수행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손을 굳게 맞잡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때 오윤선이 나섰다. “일단 두 분을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셔서 회포를 푸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윤선이 자동차를 불렀다. 

 오윤선의 집에 도착해 두 사람은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한참 만에 여운형이 먼저 입을 뗐다.

 “선생님, 이렇게 뵙다니요. 반가우면서도 원망스럽습니다. 중국에 계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안창호가 웃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내 독립운동은 성과도 없이 여기까지인 모양이오.”

 여운형이 깊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우리의 민족혁명은 대공주의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라는 말씀은 거두세요. 이제부터는 제가 다시 각하 옆을 지킬 것입니다.”

 안창호가 미소를 지었다. “대공주의. 이젠 내 간절한 염원이 되었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오윤선과 조만식이 “대공주의?”하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 

 여운형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와 제가 추진했던 민족유일당 운동은 정당통합 운동으로 진척되는 모양입니다. 상해에서 흩어진 후, 각처에서 정당들이 다시 설립되고 있답니다.” 

 “지금 임시정부는 항주에 있다고 들었소. 이동녕 국무령이 고난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있다는 소식도. 흥사단은 한국혁명당을 조직했다지요?” 

 “네, 그렇다고 합니다. 각하 압송 이후 흥사단은 한국독립당에서 분리되었나 봅니다. 김철과 조소앙이 각하에 대해 무슨 곡해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수선한 가운데 양기탁 선배가 이끌던 조선혁명당과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상해교민단, 애국부인회 등 단체가 통일 동맹에 나섰답니다. 여기에 재미 단체들도 도산의 유업을 이뤄야 한다면서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에 가세한다고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아마 중국 측과 항일공동전선이 조직될 것 같습니다.” 여운형이 차분하게 소식을 전했다.

 듣고 있던 안창호가 화제를 돌렸다. 

 “내가 말이오, 감옥 독방에서 고독하게 추운 겨울을 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오. 나이 60이 되면 물러나고 청년들에게 일을 맡기겠다는 소신이 있었소. 이제 나도 곧 60이 되겠지. 대한독립. 잘들 해 나갈 것이오. 나는 그들을 믿소.”

 여운형은 슬픈 생각이 들었다. “안 됩니다. 대공주의의 뜻을 이루셔야죠. 대공주의로 해방하고 4평등 제도확립으로 새 국가를 건설하는 것. 그 비전과 청사진은 각하의 몫입니다.”

 안창호가 웃었다. “몽양이 그렇게 생각한다니 내가 좀 더 힘을 내리다. 아직 60은 안 되기도 했고. 하하.”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조만식이 유쾌하게 물었다. “대공주의는 생소합니다. 그러나 민족진영의 현주소가 여러 노선으로 갈라져 있으니 하나로 통일하자는 주의로 이해가 됩니다만. 4평등 체제는요?”

 여운형이 안창호를 대변하듯 나서서 말했다. “도산께서는 좌우합작 민족유일당 운동이 좌절되자마자 대공주의 비전을 항일투쟁의 대안으로 제시하셨지요. 그와 동시에 민족혁명 이후 한국 사회의 제도 혁명을 위한 청사진도 함께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 ‧ 경제 ‧ 교육 ‧ 민족 평등입니다. 민주국가인 한국을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조만식이 감탄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민족 평등은 세계 대동사상과 일맥상통하는군요. 도산께서는 필히 국내 활동가들에게 대공주의를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꽃을 피워야지요. 그나저나 이번에는 경부선 노선을 따라 국토순례를 하신다고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창호가 유쾌한 듯 웃었다. “이번에는 경부선 노선, 다음에는 호남선 노선. 우리 땅을 한 바퀴 순례하고 난 후에는 대공주의 노선으로 돌아오겠소. 하하.”      

 안창호는 후배들이 있어 든든했다. ‘몽양 여운형과 고당 조만식, 이 얼마나 든든한가? 대공주의 담론은 몽양이 계승하여 고당과 힘을 합해 실천 전략을 수립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 민족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세계 대동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 민족이 추구해 온 전통사상의 현대화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조상의 홍익인간 정신을 계승하여 인류 전체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운형은 상해에서 1929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에서 혹독한 취조를 당하고 국내로 압송, 3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했다. 여운형은 1932년 7월, 4개월 만기를 앞두고 대전 형무소에서 가출옥했다. 이때 안창호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산 선생과 나의 운명이 이렇게 교차하는구나. 선생께서는 반드시 놈들의 간악한 취조와 고문을 이겨내실 것이다!’ 여운형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동안 여운형은 일본 탄압과 재정난 등의 이유로 폐간위기에 있던 기존 『중앙일보』의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개조하고 1933년 2월 16일, 사장에 취임했다. 조동호가 이를 도왔다. 중앙일보에 조선을 붙인 것은, 민족정신과 독립 의지를 표현한 여운형의 의지였다. 여운형은 좌우 균형인사로 회사를 경영했다. 일제의 유혹이 끊임없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그는 신문사 사장임에도 거리로 나가 노동자와 농민을 살피고 친분을 쌓았다. 또 중국의 동지들과 연대하는 비밀 지하운동을 펼쳐 나갔다. 

 한편, 스포츠 선각자 여운형은 체육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양에도 앞장섰다. 1934년, 여운형은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스포츠 정신을 통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했을 때,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과 금메달 기사를 신문에 실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조선중앙일보』는 결국 1937년 11월 5일에 폐간되었다.

 여운형은 조만식 등과 함께 남북을 왕래하며 해방 이후 안창호의 ‘민족혁명통일전선’ 유지에 따라 좌우합작, 남북연합건국준비 등의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 사망하였다. 

 조만식(1883~1950)은 강서 출신으로 관서 지역의 항일운동을 이끌어 온 지도자였다. 물산장려운동, 조선 민립대학 운동, 신간회 평양지회, YMCA운동을 통해 ‘조선의 간디’라는 명예 별칭을 갖고 있었다. 조만식의 인간관계는 김동원, 김병연, 오윤선, 김성업 등 흥사단 평양지역 회원들이 많았다. 그러한 연고로 1937년 흥사단 동우회 사건 때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조만식은 해방 이후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함께 하며, 한국전쟁 때 조선인민군의 총에 학살되었다.      


- (하)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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