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수기치인의 완성, 애기애타
상해에서 활동하던 많은 동지들은 안창호 불법 체포에 대해 항의하고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창호는 용수를 쓰고 포승줄에 묶여 5월 30일 상해항을 떠나 6월 7일 오전 7시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경기도 경찰부에 인계되어 경성지방법원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다음 날 6월 8일부터 열흘 간 심문을 받은 뒤, 검사국으로 넘겨져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 안창호가 검사국으로 넘겨진다는 소식을 듣고, 이광수가 서대문 감옥으로 달려와 면회를 신청했다. 이광수는 안창호를 보자마자 시야가 흐려졌다. ‘아, 어쩌자고 이런 일이...! 이럴 수는 없다. 선생님이, 선생님이...!’ 안창호가 말을 잇지 못한 채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광수를 도리어 담담하게 위로했다.
“내 실수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지 않소. 내가 그 꼴이 되었소. 너무 걱정하지 마오.”
이광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안창호가 그를 달랬다. “나는 여기까지인 모양이오. 너무 상심하지 마오. 그대 건강은 어떻소?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긴 했었는데.”
이광수가 눈물을 훔치며 겨우 입을 뗐다. “저는 괜찮습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선생님, 3년 일 것이라고들 합니다. 잘 견디셔야 합니다.”
안창호가 바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염려 마오. 나는 견디어 낼 것이오. 이거 받으시오. 회중시계요. 이갑 형님한테서 받은 선물인데, 이제 그대가 가지시오.”
이광수는 그 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안창호는 상해 거처에서 새벽 명상 수련을 할 때면 그 시계를 품에서 꺼내어 시간을 재곤 했다. 한번은 안중근의 사위 황일청이 병중 약값이 없어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시계를 내주며 전당포에 가서 돈을 빌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시계는 안창호에게 보물 같은 소중한 물건이자 비상금이었다.
이광수는 얼떨결에 시계를 받았다. “선생님, 제가 잘 간직하였다가 출옥하시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내가 살아 나오면 돌려주고, 아니면 그대가 추정과 나의 기념으로 가지시오.”
이광수는 동요 없이 꼿꼿한 모습의 안창호를 보며, 그가 초인超人처럼 느껴졌다.
검사국에 송치된 안창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9월 2일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판사의 지루한 심문이 진행되었다. 일본은 안창호가 노력한 한중합작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안창호의 공소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1926년 7월 중 상해 삼일당에서, 상해 거주 백여 명과 임시정부 재정후원회를 조직하여 현장에서 2백여 원을 거두어 임시정부 재무부에 교부한 사실. 둘째, 1919년 조선독립을 목적한 대한독립당을 조직한 사실. 셋째, 1931년 11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다 사정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한 사실>
변호사 김병로와 김용무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1932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고 조작하여 안창호에게 4년 실형을 선고했다.
안창호는 지인들에게 껄껄 웃으면서 “30년 독립운동이 남긴 것이 겨우 4년 징역밖에 없소.”라는 허탈한 유머를 남겼다. 그리고 동포와 지인들에게 자신을 걱정해주고 보살펴준 호의에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서대문 감옥으로 이강이 찾아왔다. 뜻밖의 면회 요청에 안창호는 마음이 들떴다. ‘정래가 풀려나 있었구나.’ 안창호는 이강을 보고 반갑게 웃음 지었다.
“도산, 이 꼴이 도대체 뭐란 말이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단 말이오.” 이강은 울먹였다.
“정래, 그대가 살아있었구려. 혜빈 씨는? 혜빈 씨도 같이 있소?”
안창호는 1928년 봄, 민족유일당 강령과 대공주의를 의논하러 이강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강 대신 그의 아내 혜빈이 울면서 자신을 맞이해주던 일이 떠올랐다.
“같이 있다오. 지금 밖에서 울면서 기다리고 있소.”
“그대는 언제 어디서 풀려난 것이오? 지금은 어떤 신세요? 아예 귀국이라도 했소?” 안창호는 보채듯이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작년에 풀려났소. 평양에서 동우회 활동을 하고 있지. 손이 근질거려서 『평양형무소의 11공장』이라는 글을 『동광』에 실었소. 도산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왔지. 그래, 상해에서 민족유일당이 좌절될 때 국내에서는 신간회가 해체됩디다. 민족유일당의 실패는 좌우합작의 실패를 의미할 테지. 그렇지만 도산의 대안은 대공주의였지 않소? 그러다가 감옥으로 들어온 것이오?”
면회 시간이 짧다는 생각이 앞섰던지 이강은 빠르게 본론부터 짚었다.
안창호는 행복했다. ‘역시 전략가다. 내 그림자 같은 존재이자 평생 친구요, 동지.’
“대공주의는 꿈이었지. 거품이랄까? 앞으로도 불가능하겠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언제 도산이 거품 같은 생각을 했다는 말이오? 대공주의는 좌우 통합주의! 통일해서 완전독립을 이루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이상을 비하하지는 마오. 도산의 이상은 곧 나의 이상이오. 나는 그 별을 쫓을 거요.” 이강이 이마를 찌푸리며 진중하게 말했다.
안창호는 그런 이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감옥생활이 얼마나 혹독했길래 얼굴이 저리도 많이 상했을까?’
“동우회 상황은 어떻소? 춘원이 그림자처럼 이곳을 왔다 갔다 하고 있긴 한데.... 수양을 벗어던진 동우회가 혁명1지대 역할을 할 수 있겠소?”
이강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독립혁명이 자아혁신으로 달성된다면 얼마나 좋겠소. 만주국 성립 이후 탄압 국면이 한층 엄혹해지지 않았소. 이런 상황에서 혁명1지대가 된다는 건 동우회를 송두리째 역사에 바치는 일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을 것 같소만....”
“음, 그렇구려. 그렇다면 공약을 걸고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어떻소? 우리의 목적은 독립에 대비하는 투사양성이오.” 안창호는 이강의 판단을 기대하며 말했다.
“흥사단 공약에 대공주의도 반영하면 좋겠소. 도산은 대공주의로 좌우진영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오?” 이강이 웃었다.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안창호는 문득 이강이 춘원을 지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춘원, 그는 포위된 사람 같소. 활기가 없더란 말이지. 내 탓이겠지만.... 결국 춘원이 앞장서서 흥사단 약법을 수려하게 수정해야 할 것이오.”
바로 그때 면회 시간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들어왔다.
이강이 일어서면서 서둘러 말했다.
“도산, 오늘 저녁부터 삼시세끼 식사를 거르지 마오. 혜빈과 내가 수발을 들 거요. 그리고 나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겠소. 내가 있을 곳은 동우회는 아니요. 도산의 빈자리를 채우러 가야지. 임시정부를 돕겠소.”
“고맙소, 친구. 어디를 가든 무탈하시오. 그대는 바로 나요. 나도 잘 지내고 있겠소.”
두 사람은 이렇게 헤어졌다.
이강은 안창호가 항소를 포기하고 1933년 3월 28일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는 것을 지켜보고, 대만을 거쳐 중국 복건성 천주로 탈출했다. 임시정부는 진강으로 이동해 있었다. 이강은 임시정부를 도왔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1941년 4개 지대를 편성하여 장시성, 저장성, 안휘성 등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였을 때, 이강은 제1지대 제2구대 소속으로 영안, 남평, 건양 등에서 모병 활동을 수행하면서 백의종군하였다. 해방된 후에는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아 대만 교포 선무단 단장으로 귀국했다.
안창호는 대전형무소에서 옥중 노역을 하면서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하였다. 인격수양. 짬짬이 한국지리와 산천에 대한 독서도 잊지 않았다. 언젠가 출소하면 조국 산천을 순례하고 싶었다. 금수강산. 아름다운 조국을 순례하면서 이상촌에 적합한 장소도 찾아볼 생각이었다. 옥중 식생활은 안창호의 고질병인 위장병을 악화시켰다.
안창호는 혜련과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가족을 떠올릴 때마다 밀려왔던 감정들을 하나씩 정리해서 아내에게 반성문을 쓴 셈이었다.
<남편과 아비의 직분을 다 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책망합니다.>
<미국에 계신 여러 친구와 동포들이 나를 동정하여 걱정하심에 황송합니다.>라는 안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견하고, 자신이 걸어왔던 인생을 돌이켜본 소회를 편지에 실었다.
<나의 남아 있는 운명은 알 수 없으나 설혹 옥에서 목숨을 마친다고 하여도 한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장래는 자연에 맡기고 평소에 지은 죄과를 참회하고 심신을 새로이 단련하여 옥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어디에 있든지 남아 있는 짧은 시간을 화평한 마음으로 지내려고 준비하고 힘씁니다.>
<내 친구 중 나보다 먼저 세상을 작별하고 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중략) 나는 나의 지나간 역사의 그릇된 자취를 더듬어 보고 양심에 책망을 받음으로 비상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지나갔으니 후회막급으로 생각을 하여도 별도리가 없습니다. 그런즉 지나간 모든 것을 다 끊어 보내어 버리고 오직 남아 있는 짧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함이외다. 아무 별것이 없고 오직 사랑뿐입니다.>
안창호는 이 말끝에 자신의 인생과 철학을 총정리하여 이렇게 썼다.
<사랑, 이것이 인생이 밟아 나갈 최고의 진리입니다. 인생의 모든 행복은 인류 간의 화평에서 나오고 화평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정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사랑을 믿고 사랑을 품고 사랑을 행하는 그 사람, 자신의 마음이 비상한 화평 상태에 있으므로 남이 헤아리지 못할 무한한 행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즉 나나 당신이 앞으로 남아 있는 시간에 우리 몸이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마음이 완전히 화평에 이르도록 사랑을 믿고 행합시다.>
<내가 이처럼 고요한 곳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결과 ‘사랑’ 두 글자를 보내오니 당신의 사랑하는 남편이 옥중에서 보내는 선물로 받으소서.>
안창호는 생애 말년 감옥에서 ‘애기애타’라는 휘호를 남겼다. 애기애타는 안창호가 자신의 인생과 철학을 총정리하여 집대성한 생애 마지막 유훈이다. 애기애타는 인류의 평화를 지향하는 실천덕목이자 수기치인의 완성이다. 또한,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동양의 유교 사상을 아우르는 촌철의 진리이다.
기독교에서 ‘애기’는 내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그 사랑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귀한 존재가 된다. 내가 귀한 존재이므로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만나게 될 사람도 모두 귀한 존재들이다.
이웃이 귀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더불어서 함께 존재하고 함께 만들어 가는 사회, 그것이 변화이고 역사다. ‘애타’의 삶은 타인의 거울에 나를 비춰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나아가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안창호 자신은 평생 애기애타의 삶을 살았다.
애기애타 정신에는 독립운동에 목숨 바친 많은 역사 인물이 담겨있다. 안창호를 따르고 그의 뜻에 감동하여 의기투합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사상과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험담과 모함과 공격을 일삼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안창호가 존경한 인물들, 안창호의 친구들, 안창호가 특별히 아끼고 사랑한 사람들, 안창호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 안창호를 배신한 사람들, 안창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 안창호는 이 모든 이들을 위해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생애의 눈물을 ‘애기애타’ 휘호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