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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May 16. 2023

제10장. 낙심마오 #6/10

6화. 안창호 체포

6화. 안창호 체포

      

 만보산사건을 계기로 안창호가 주장했던 한인각단체연합회는 1931년 7월 18일에 부활했다. 단체의 통일과 일원화를 통해 한중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에도 한발 다가섰다.

 예견했던 것처럼,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봉천 교외에서 만주철도를 폭파시켰다. 이 사건은 일본 관동군이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 위해 시동을 건 사건이었다. 관동군은 만주철도 폭파가 중국인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군을 밀어붙여 19일 새벽 봉천성을 장악하고 이어서 요녕성과 길림성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11월, 하얼빈과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친일 위성 정권 만주국을 수립하고자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내세워 남경 정부와 단절시켰다.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치러졌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 군사력을 집중하고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해서는 저항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권력 기반이 취약한 상태였다. 그는 국민당 반 장제스파 원로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가운데 동북 잔여 군벌의 정복 과정에 있었고, 남방지역에서는 공산당 소비에트 정부 수립으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장제스는 일본의 만주침략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소하여 외교적 수단을 동원, 평화적으로 해결하길 원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내전 상황에 군사력을 집중하고 일본의 만주사변에 대해 부저항 정책으로 일관하자 국제연맹과 중국 내에서 비판이 일었다. 비난 여론에 몰린 장제스는 11월, 좌파 왕정위와 타협하고 잠시 공직에서 물러났다. 왕정위는 즉시 남북(국공)화평회의를 주재했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후 13개 성에 15개 근거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정강산은 호남성, 강서성, 광동성의 경계지역으로 6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강산에서 합류한 모택동과 주덕은 이 지역에 소비에트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1931년 11월 강서성 서금에 수도를 정하고 임시중앙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남경 국민정부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모택동이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주덕은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이당치국 체제가 성립했다. 또한 공산당중앙정부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홍군 제4군을 결성했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포위 공격에 나섰다. 장제스는 홍군의 게릴라식 유격 전술에 맞서 진지전으로 지구전을 펼쳤다. 수세에 몰린 홍군은 대장정을 감행하게 된다.      


 만주사변으로 긴장한 안창호와 임시정부는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안창호는 이유필과 긴밀하게 논의했다. 

 “춘산, 만주사변은 한국혁명에 또 하나의 큰 짐이 되어버렸소. 이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어찌 알려야겠소? 국민당이 만주를 통째로 일본에 넘길 모양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속수무책이란 말이오? 참 큰일이오.” 춘산은 이유필의 아호다.

 “각하, 일본이 중국 국공내전을 활용한 모양새가 간교함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사건으로 장개석은 일단 뒤로 주춤한 상태라고 하니, 국민당 좌파 왕정위가 어떤 조치를 내릴지.... 왕정위는 좌파라고는 하지만 공산당에서 축출된 인물이고 국민당 내부 반 장개석파의 지지는 미흡한 상태이고. 그러니 국민당에 경각심을 호소하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유필은 거침없이 정세를 어필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만주 교민을 위해 나설 수밖에 없소. 방법은 의열투쟁. 희생이 따르겠지만 중국인을 각성시키는 효과로는 최고지.” 안창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 일단 한인각단체연합회 대회를 여시지요. ‘우리의 할 일’을 주제로 의견을 모으시지요. 합의가 중요합니다. 임시정부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당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옳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오. 임시정부의 특무공작대 구성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도산께서 이동녕 영감님을 설득하여 특무공작대를 조직하게 하고 그 전권은 백범에게 위임하십시오.”

 “음, 임시정부 산하에 청년 비밀결사대원을 조직한다...! 그렇게 합시다. 내가 이동녕과 백범을 만나겠소.”

 “저는 엄항섭과 안공근을 만나보겠습니다.” 엄항섭과 안공근은 김구의 최측근이었다.     


 이동녕과 김구는 안창호의 제안에 합의했다. 이동녕은 즉각 의정원 의장 송병조와 합의하여 회의를 열고 절차에 들어갔다. 송병조 의장은 흥사단 동지였다. 1931년 10월, 이들은 임시정부 산하 비밀결사대 조직을 공식화했다. 전권을 위임받은 김구는 대원 80여 명을 모아놓고 ‘실행을 중시하고 발언은 피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리고 비밀결사대 이름을 한인애국단으로 결정했다. 단장은 안공근이었고, 엄항섭이 앞장섰다. 안경근, 김홍일, 이덕주, 김의한, 손두환, 유상근, 최흥식 등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안창호는 1931년 9월 25일, 한인각단체연합회 대회를 상해에서 개최했다. 안창호는 흥사단 대표로 참석하여 한중공동투쟁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한인각단체연합회 주최로 상해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상해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인 신문 기자들을 초대하여 항일전선에 관한 연설로 큰 호응을 얻었다. 10월 27일에는 중국국민당 정부와 중국의 각 운동단체와 한중합작 항일투쟁기구를 조직하기 위해 중국 대표들을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시국 대책에 대해서 연설하고 <중국 동포에게 고함>을 주제로 호소문을 배포하여 한중연합 투쟁을 제안했다. 

 11월, 남북화평회의 참석차 왕정위가 상해를 방문했다. 안창호는 왕정위를 방문하여 한중합작 항일운동에 합의를 끌어냈다. 이어서 한중합작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2월 초, 흥사단 단소에서 우선 급한 대로 민족 진영으로만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1932년이 되자 정세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긴박하게 돌아갔다. 1월에 대한교민단 지도부가 개편되었다. 정무위원에 김구와 김철 그리고 정무위원장에 이유필이 선출되었다. 이들 모두 한인애국단 소속이었다. 1월 8일,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이 동경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였고, 이내 체포되었다. 이봉창은 1932년 10월 10일, 동경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신언준과 흥사단이 이봉창의 동경의거 소식을 중국 각 언론사에 전달했다. 그런 가운데 흥사단은 예정대로 1월 18~19일 제18차 원동대회를 통해 민족의 좌우합작과 통일 대단결을 촉구했다. 마침 하와이에서 하와이대한교민단을 해체하고 이전처럼 대한인국민회를 재건한다는 통신이 당도했다.      


 1월 28일, 상해 조계 경비 담당 일본해군육전대와 중국군 19로군 사이에 전투가 발발하자, 안창호는 2월 1일 자로 흥사단대회에서 결의한 <경고 중국동포>라는 격문을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이름으로 발표했다. 안창호는 상해사변이 만주국 수립 선포(1932.3.1.)를 앞둔 일본의 간악한 술수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상해사변은 일본군이 만주국 수립에 대한 국제 열강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상해에서 꾀한 모종의 음모였다. 중국인이 일본인 탁발승을 총으로 쏘았다는 것이 사건의 빌미였으나, 그 중국인은 실상 일본군에 의해 매수된 사람이었다. 일본은 2월, 3개 사단을 파견했다. 중국군은 3월 상해 외곽으로 퇴각했다.  

    

 임시정부를 끌고 가던 이동녕 국무령이 다급하게 안창호를 찾았다. 

 “국민당 지도부가 도산을 찾고 있습니다. 다짜고짜 한국 임시정부 영수가 누구냐고 묻기에 내가 도산 안창호라고 했소. 허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국의 혁명 영수는 당연히 석오 각하이시지요, 하하.” 석오는 이동녕의 아호다.

 “나야 임시정부의 늙은 문지기일 뿐이지. 실질적인 우두머리는 도산, 바로 그대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래, 누가 찾아왔습니까? 혹시 국민당 상해지역 사령관 천밍슈란 자입니까?” 

 안창호는 며칠 전 왕야차오와 만난 일을 기억했다. 왕야차오는 이번 상해사변에 국민당이 나서면 중일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다. 안창호는 한중 간 항일공동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인애국단을 염두에 두었다. 왕야차오는 천밍슈와 이 사실을 의논하겠다고 했다.

 이동녕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사람을 알고 계셨던 것이오? 아마도 상해사변 일로 우리와 의논할 게 있는가 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왕야차오라는 사람입니다. 암살대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지요. 그와 한중 간 연합 대책을 주고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가 천밍슈와 상의하겠다고 했습니다.” 

 “국민당이 다급하게 되었소. 놈들이 남의 집 앞마당에서 승전기념식을 계획하다니....” 이동녕은 혀를 찼다.

 “임시정부 대표는 각하이시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같이 만나보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안창호는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며칠 후, 안창호는 이동녕을 모시고 국민당 상해 ‧ 남경 위수사령관 천밍슈와 왕야차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안창호는 국민당과의 항일공동전선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왕야차오는 공동전선을 서두르자고 했고, 천밍슈도 국민당을 얕보고 있는 일본군에 분노하며 이에 동조했다.

 안창호는 진지하게 경청하면서 이동녕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동녕은 ‘우리는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뜻을 안창호에게 눈빛으로 전했다. 

 안창호가 비서에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특무공작대가 있소. 비용을 대시겠소?”

 “물론입니다. 한국을 믿습니다.”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안창호가 다짐을 두듯이 말했다.

 “이번 일은 일회성에 불과하지만, 일본은 더 큰 규모로 전쟁을 해 올 것이오. 중일전쟁 말이오. 그러니 한중연합 동맹군을 결성해야 합니다.”

 국민당은 임시정부 후원을 약속했다. 천밍슈와 왕야차오가 낸 성금 1만 원과 19로군의 위로금 1만 원. 합해서 2만 원을 임시정부에 주었다. 이동녕은 김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김구는 이 일에 전권을 맡겨달라고 했다. 


 4월 29일 일본은 홍구공원에 사단 병력을 모아놓고 천장절 행사를 계획했다. 이날, 한국인 청년 윤봉길의 장렬한 의거가 있었다. 

 윤봉길(1908~1932)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넘어와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을 목격했다. 그 길로 상해에 도착한 때가 8월이었다. 이후 안창호와 이유필을 만나 인격적인 감화를 받았다. 안창호는 윤봉길의 사연을 듣고 그의 농촌개혁에 대한 꿈을 높이 샀다. 장차 미국으로 유학하여 농업생명학을 전공할 수 있도록 영어공부를 권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이들의 주선으로 안공근의 집에 거처하면서 박진이 경영하던 말총 모자 공장에 다녔다. 그리고 이곳에서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등 청년지도자의 삶을 살았다. 틈틈이 영어공부도 했다. 그러나 만주사변에 이어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이 일어났고, 동경에서 벌어진 이봉창 의거 소식까지 접하게 되었다. 윤봉길은 고심 끝에 김구를 찾아갔다. 윤봉길은 김구로부터 상해의 일본 군기창고 폭파 계획을 듣고 의열투쟁에 가담하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가 무산되자 다시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기념행사로 열리는 일본군의 전승축하식을 겨냥해, 폭탄투척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거사는 성공적이었다. 

 일본은 5월에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육군을 상해에서 철수시켰다.      


 1932년 4월 29일 거사 직후 오후 3시 반경, 프랑스 조계 보강리 54호 교민단장 이유필 집을 방문하던 안창호는 불법 납치를 당해 프랑스 조계 구치소에 구금되었다. 5월 1일, 안창호는 일본 헌병대 사령부로 넘겨졌다. 윤봉길도 이곳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안창호의 피랍 사실을 접한 중국 언론들은 안창호를 한국 독립혁명의 탁월한 지도자로 평가하면서 중국의 손문에 비견하였다. 중국인들은 곧바로 석방 운동에 나섰다. 특히 상해 변호사회가 앞장섰다. 상해각단체구국연합회를 비롯하여 중한민족항일대동맹회, 상해상공회의소 등이 안창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상해 교민들도 도산 석방위원회를 결성했다. 상해교민단은 즉각 이유필 명의로 프랑스 조계 당국에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프랑스 전권공사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그리고 파리의 급진사회당에 안창호 석방을 요구하는 전문을 발송했다. 흥사단원동위원부는 모금 운동을 벌이는 한편, 미주로 장남 필립에게 전보를 보내 상해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올만을 선임했다. 올만은 5월 중순, 필립의 전권 위임 전보를 받고 변호인 활동을 시작했다. 비용은 공평사 이사장 조상섭이 후원했다.     


 안창호가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갇혀있는 2개월 동안 처제 정실이 감옥 뒷바라지를 했다. 이정실은 남편 김창세에게 전보를 쳤다. 김창세는 당시 위생교육협회 현장 감독관으로 국민당 정부를 돕고 있었다. 김창세는 <건강은 훌륭한 국가의 토대>라는 강좌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김창세는 1930년 2월 중국 공중위생 향상을 위한 지원 활동의 일환으로 <중국인 식단의 우유 대용 두유 사용>을 주제로 존스 홉킨스대학 세미나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1931년 뉴욕 시장의 주선으로 뉴욕 차이나타운에 의료시설 설치를 돕고 위생국장으로 취임했다. 김창세는 뉴욕 맨해튼 보이스카우트 보건과장 업무도 보았다. 1932년 5월 4일, 김창세는 볼티모어에서 안창호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대한인국민회는 김창세에게 서재필을 모시고 미 국무부와 협의해 줄 것을 명했다. 김창세는 즉각 미 검찰총장, 국무차관과 면담했고, 미 석간지 『볼티모어 선 Baltimore Sun』에 안창호의 불법체포 기사를 실어 이 사실을 널리 알렸다. 또 여러 경로를 통하여 상원의원 등과 접촉했고, 뉴욕과 애틀랜타를 방문, 교회연합회와 감리교 애틀랜타 총회에 보고했다. 김창세는 도산 안창호의 구명과 석방을 위해 맹활약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일본영사관의 방해 공작 때문이었다. 김창세는 실의에 빠졌다. 1934년, 김창세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상해에 있는 가족을 미국으로 이주시키려고 했으나, 미국의 유색인종 이주 제한정책에 가로막혀 성사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김창세는 계속해서 중국 정부를 돕기 위해 항주 결핵병원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과 대중강연 등 사회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밀정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사람으로부터 끈질긴 협박과 폭력에 시달렸다. 김창세는 우울증에 걸렸다. 1934년 3월 15일, 김창세는 유서를 남기고 뉴욕의 55번가 아파트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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