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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May 13. 2023

제10장. 낙심마오 #5/10

5화. 경제정의 실천운동, 흥사단 공평사

5화. 경제정의 실천운동, 흥사단 공평사

  

 안창호가 오랫동안 구상해 왔던 경제정의 실천 운동은 1930년 들어 흥사단대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공립협회와 신민회 때는 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을 일으키고자 했고. 연해주 망명 시절에는 민족의 교화와 경제를 개량, 진보할 목적으로 공제회를 설립했다. 또한, 망명 시기 미주에서는 공기업 형태의 북미실업주식회사 설립과 운영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1929년 10월 미국발 세계 대공황의 파도는 중국에도 생산과 소비의 위축으로 이어져 경제위기를 몰고 왔다. 교민들은 중국인의 눈치를 봐야 했고 위협도 감수해야 했다. 안창호는 교민과 만주동포 구휼에 정성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1월 1~2일, 제16차 흥사단 원동대회가 프랑스 조계 막리애로 16호 인화의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전통적으로 흥사단대회는 한 해를 평가하고 새로운 한 해의 운동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모이는 공적인 자리였다. 흥사단대회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공론을 형성하고 공론에 복종하기로 결의하는 회합이었다. 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도 대회가 열리면 의무참석을 해야 했다. 덕분에 동지들은 대회를 통해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상부상조할 수 있었다. 또 흥사단대회는 인물 발굴의 현장이기도 했다. 잠재되어 있던 재능이 드러나고 동지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 성장과 활동에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대회는 보통 2일에 걸쳐 상견례, 토론회 또는 강론회, 정의돈수, 상별례로 진행되었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39명으로, 안창호, 송병조, 조상섭, 장덕로, 김홍서, 이유필, 김창세, 김붕준, 선우혁, 김정근, 나우, 임득산, 박창세, 홍재형, 신언준, 유정우, 박영호, 최해경, 서상석, 박규명, 이탁, 최석순, 유일, 김두만, 차리석, 양명진, 문일민, 김병연, 구익균, 위혜원, 박창준, 박규찬, 박제도, 장죽식, 안원생, 이명옥, 박이길, 양희제, 조낙천 등이었다. 

 이날, 안창호는 강론회 사회자로 등단하여 신언준을 세웠다. 신언준은 “현하 우리의 환경과 흥사단”을 주제로 연설했다. 안창호는 어느덧 52세, 신언준은 27세였다. 안창호는 특별히 청년들을 사랑했다. 


 이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또 한쪽에서는 안창호의 사회로 임원 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경제적으로 약소한 처지에 있는 소비자, 농민, 노동자 그리고 영세 상공인을 위한 사업 개선 및 권익 옹호에 관한 것이었다. 임원들은 이를 위한 협력 단체로 협동조합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이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차리석, 조상섭, 이유필이었다. 차리석은 이 협동조합 운동이 ‘도산의 경제 평등 구현의 실마리’가 될 것으로 믿었다. 

 대회 결의 내용에 따라 1월 26일, 안창호를 포함하여 단우 18인이 협동조합 성격의 동인호조사를 발기했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는 청년 신언준을 발탁하여 선언문 기초와 규약안을 준비시키고 조직착수에 들어갔다. 


 동인호조사는 1년 후인 1931년, 1월 6~7일에 개최된 제17차 흥사단 원동대회에서 공평사로 개칭하고 3월에 사업안을 확정했다. ‘공평사’는 대공주의의 경제평등 이념을 반영한 명칭이었다. 공평사의 선언과 규약에 따르면, <협동조합의 정신으로 소비 합작을 실시하여, 점차 신용 생산 등의 합작으로 나아가 생활의 역량을 증가시키고 합작운동을 역행하여 합작 사업을 보급 발전케 할 것이며, 자활, 자위를 모토로 한 경제합작운동을 하기 위하여 회원에게 한하는 구매조합 조직 및 금융업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공평사는 일종의 소비자협동조합이었다. 우선 소비조합에서 출발하여 상점을 개설하고 자금을 협동 저축하여 신용 합작과 생산 합작의 단계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70여 명이 이 조합에 참여했다. 조상섭이 공평사의 이사장 대리를 맡았고, 1932년 10월부터 투자금으로 원창공사라는 상점을 개설하고 영업을 개시하여 이익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원창은 조상섭의 이명이었다. 공평사는 식료품 공급의 소비조합 역할을 하다가, 윤봉길 홍구공원 의거로 인해 안타깝게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931년 들어 일본은 만주로 도피한 한국 동포에게 가혹한 탄압과 노동력 착취를 일삼았다. 일본은 만주침략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중국 언론은 이를 심각한 ‘한교문제’로 다루었다. 5월 11일, 마침 중국국민당 전당대회가 남경에서 열렸다. 안창호는 문득 여운형이 그리웠다. 만약 여운형이 수감되지 않았다면 이곳에 함께 왔을 터였다.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현재 안창호의 측근에는 임시정부의 실력자 이유필이 있었다. 이유필은 흥사단 동지이며 한국독립당의 총무 주임이었다. 이유필은 한국노병회 이사장으로 나창헌과 함께 병인의용대와 대한교민단의 의경대를 지도하고 있었다. 이유필은 또 한국의용군상해사령부를 설치하여 한중 동맹 활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이유필 등과 함께 중국 언론인들과 교류가 깊은 청년 신언준을 대동하고 이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안창호는 첫날, 중국국민당 인사들과 만주지역 각 단체 대표들과 교섭 활동에 나섰다. 다음 날 임시정부 명의로 「동삼성 한교문제」 제하의 소책자를 만들어 각 현의 관공서에 배부했다. <한인과 중국인이 공존공영하려면 일본을 공동으로 물리쳐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1931년 들어 자주 불거지는 중국인과 한국 교민 간의 갈등 문제, 다시 말해 일본이 벌이고 있는 한중 이간 정책들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예상했던 바대로 일본은 7월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 수로 개척 현장에서 한국 농민과 중국인 지주와 주민 사이에 소요사태를 조장했다. 수로 개척은 관동군이 대륙침략을 목적으로 재만 한국 농민을 만보산 농장으로 불러들여 벌인 불법 사업이었다. 일본은 과장된 허위 특보로 중국인을 자극하여 한인과 충돌을 유발시켰다. 이른바 만보산사건이다. 안창호와 이유필, 김철 등 임정 요원들은 일본이 폭력 제압을 구실삼아 관동군을 증파할 것에 대비하여 한중동맹군을 결성하자고 여론전을 펼쳤고, 신언준이 필력을 발휘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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