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여운형 체포와 이탁의 서거
한편, 여운형은 상해 복단대학교 체육교수로 취직했다. 1928년 12월 20일, 한중 친선경기로 연희전문학교 축구단을 초청하고 교류했다. 여운형은 안창호를 초대하여 훈화시간을 마련했다. 안창호는 환영 훈화를 통해서 대공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대중 앞에 드러냈다.
안창호는 청년들에게 말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이는 내가 대한의 청년들을 만날 때마다 강조하는 말이오. 이 말 다음으로 나는 또, ‘개인은 민족에 봉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무와 민족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오. 민족에 대한 의무 수행이란 민족독립이라는 신성한 사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큰 기대를 걸고 외교전을 펼쳤으나 강국들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소. 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도 기대를 걸고 참여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코민테른 테제로 우리 민족혁명은 분열되었소. 외교에 주목하고 잘 대응하는 것은 꼭 필요하오. 그러나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의 말을 믿고, 대한 사람의 글을 믿어야 하오. 3.1만세 운동을 잠시 돌아봅시다. 그때 우리는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에서 우리 지도자의 말을 믿고 따르며 통일된 한마음으로 뭉쳤소. 학생들이 앞장서서 아까운 목숨을 바쳤소. 참으로 위대한 힘을 보여줬고 세계에 이를 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안타깝게도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번번이 통합과 분열을 반복하면서 여기까지 왔소. 원인은 세계정세 변화에 대응하는 우리의 뿌리가 약했던 까닭입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것도, 유일독립당 결성이 좌절된 것도, 우리의 약한 뿌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식민지 약소국의 불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대외 의존 전략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다.’ 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식민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본을 타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민족혁명을 이뤄야 합니다. 민족유일당으로 임시정부의 기능을 되살리고자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좌와 우로 갈라졌습니다. 민족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길잡이 이념이 필요하다면 나는 차라리 대공주의를 주창합니다. 대공주의는 통일이념이요, 통합과 협동과 연대의 전략을 추구하는 이념입니다. 독립혁명이 달성되면 문명 부강한 새 나라, 세계에 모범적인 민주국가를 건설합시다. 민족 평등, 정치 평등, 경제 평등, 교육 평등의 대공 사회를 이룹시다. 이것이 민족혁명입니다. 이러한 비전으로 나는 학생 여러분이 깨어있는 자유 시민이 되기를 바랍니다. 깨어있다는 말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유 시민은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하는 민주시민을 말합니다.”
안창호는 대공주의를 피압박민족의 경세와 윤리의 사상체계로 공식 제기했다. 여운형은 이 연설을 경청하면서 ‘대공주의는 안창호의 통합 이념’이라고 생각했다. ‘도산은 넘어져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여운형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상해의 수많은 애국 교민들이 초청되어 이 훈화를 같이 경청했다. 차리석을 비롯하여 조상섭, 송병조, 선우혁 등 임시정부와 동명학원을 이끌던 흥사단 동지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여운형은 스포츠 지식인이요, 스포츠 선각자였다. 그는 1929년 상해복단대학교 축구단을 인솔하여 필리핀, 보르네오, 말레이, 싱가폴, 수마트라, 자바 등으로 30여 차례 원정경기를 다니면서 ‘도산의 이상촌 부지’를 탐사하고 식민지 약소국의 실정을 파악했다. 안창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운형에게 남중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보르네오, 말레이, 싱가폴, 인도네시아, 내몽고 등지로 이상촌 답사계획을 말해왔다.
여운형은 원정경기가 진행될 때마다 유창한 영어와 중국어로 청년과 지역민을 대상으로 연설했다. 연설을 통해 여운형은 영국과 미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 정책을 성토하고 일본의 동남아 침략에 대비할 것을 강조했다. 싱가폴 해방과 필리핀 독립을 주장하면서 안창호의 민족혁명과 민족 평등 구현을 위한 소약국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여운형은 안창호에게 이상촌 부지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싱가폴, 보르네오 등의 생산자원과 주생산 품목, 노동 인력의 수요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동남아 지역은 중국 화교들의 부를 창출하는 지역이며 그들의 천국이라는 사실도 안창호에게 전달했다.
안창호는 이상촌 탐사 특파원으로 임득산을 자바섬으로 파견했고, 김창세를 필리핀으로 파견했다. 김창세는 1929년 2월, 필리핀 총독부와의 직접적인 협상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안창호를 필리핀으로 안내했다. 안창호는 만주동포를 중국 이름으로 개명하여 이주시킬 계획이었으나 필리핀 총독부가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이러한 노력은 1931년에도 계속되었다. 1931년 2월, 안창호는 양기탁과 함께 북양 대학 영문학 교수로 재직 중인 김규식을 만나 만주사태를 대비하여 여운형이 추천했던 보르네오섬 집단이주 계획을 수립했다. 보르네오 당국과 협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여운형을 대신해 김규식의 외교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운형은 1929년 7월 10일, 상해 요동운동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안창호는 여운형의 체포 소식을 듣고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몽양, 그대도 내 곁을 떠나는구려.’ 안창호는 며칠간 기도와 깊은 명상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안창호가 천진과 상해를 오가며 경제 평등, 정치 평등의 디딤돌 놓기에 분주할 때, 이탁이 세상을 떠났다. 1930년 5월 17일의 일이었다.
이탁(1889~1930)은 평안남도 성천군 일대에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부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며 성장했다. 1908년 19살 늦깎이로 대성학교에 입학하여 동갑내기 의주 출신 오동진과 더불어 안창호의 제자가 되었다. 안창호는 이탁과 오동진을 신민회로 입회시켜 가까이 두었다.
이탁은 1910년 안창호의 권고에 따라 만주 일대를 답사하면서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다가, 국가상실 직후 서간도로 망명, 유하현 삼원보에 정착하였고,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다. 이후 1912년 부민단 결성과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학교 운영기금 조달 및 학교 경영에도 참여했다. 3.1항쟁 이후 이탁은 단동에서 오동진, 안병찬과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하고 이를 남만 광복군사령부로 개편하여 임시정부 산하에 두었다. 광복군사령부는 설치 초기인 1920년대에 6개 군영, 3,780명이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총영을 설치하여 지휘명령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총영장에 오동진, 총영장 대리 겸 참모장으로 이탁이 임명되어 서간도 지역 군사 통일기관 창설을 맡았다.
이탁은 민족유일당 운동이 좌절된 1929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의정원으로 복귀하여 안창호 곁을 지켰다. 숱한 고난과 좌절이 있었지만, 스승과 함께하며 또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만주 3부의 완전 통합은 이루지 못했지만, 남만주의 조선혁명당과 동북만주의 한국독립당이 각각 이당치국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니 절반의 성공은 이룬 셈이라고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의 성립은 장차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될 것이라고 예견하셨다. 스승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대한민족이 희망하고 있는 진리의 길이라고 믿고 계신다.’
이탁은 스승 곁에서 쉬고 싶었다. 만년 친구 오동진이 1927년에 체포된 후로 이탁은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았다. ‘나이 40이면 불혹이라 했다. 오동진과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미혹되지 않고 독립군을 이끌었다. 더구나 존경하던 스승 안창호가 임시정부로 왔을 때 우리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기억이 새롭다.’ 이탁은 상해에서 스승을 지키기로 하고, 오동진은 만주를 지키기로 했다. 오동진은 김동삼을 만났다. 도산과 김동삼. 이탁은 두 거물이 국민대표회의에서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배려와 양보. 그러나 큰일에는 원칙을 중시하는 지도자. 도산을 모시고 3부 통합을 위해 만주를 누비고 다녔던 기억도 새로웠다. ‘스승님은 만주독립군 기지를 이상촌으로 개발하려고 애쓰셨지.’ 이탁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꿈을 꾸고 있는 스승께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보냈다. 이탁은 만주 청년들의 중국군관학교 입교 알선을 도왔다. 이탁은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동생 석이는 1920년 작탄 거사 때 체포되어 고향에서 감옥살이를 끝내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석이는 평양흥사단 동우구락부 활동을 한다고 전해 들었다. 이탁은 안창호에게 고향으로 잠입해서 이상촌 자금을 마련해 돌아오겠다고 했다. 이탁은 소리 없이 고향을 방문하여 선친 묘소를 찾아 참배한 뒤 1930년 상해로 돌아왔다. 그리고 1930년 5월 17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마흔둘이었다. 안창호는 그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이탁의 장례는 임시정부와 대한교민단 합동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안창호는 그를 정안사에 안장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