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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May 09. 2023

제10장. 낙심마오 #1/10

1화. 민족유일당 강령 구상

1화. 민족유일당 강령 구상     


 안창호는 민족유일당의 강령을 구상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자기 생각과 계획을 이해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친구 이강이 필요했다. 이강에게는 무엇이든 토로할 수 있었다. 안창호가 이강의 집으로 들어서자 어찌 된 영문인지 이강의 아내 안혜빈이 뛰어나와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이강은 안창호가 만주 순회를 떠나자 화남지방 일대를 돌아보기 위해 상해를 떠났다. 이강은 안창호를 대신해 광동성, 마카오, 대만, 하이난섬 등을 순회하고 이상촌 부지를 탐색하면서 민족유일당 유세를 했다. 1928년 3월, 이강은 복건성 하문(샤먼)에 도착하여 한인 교회에서 ‘조선 현상과 교육 형편’을 주제로 강연하다가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강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심문을 받고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안창호는 이강의 아내가 주저앉아 우는 것을 보고 같이 흐느꼈다. ‘아, 정래, 어쩌다 이런 일이! 치안유지법이라면 적어도 3년 형을 살겠구먼!’ 안혜빈은 자신도 평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안창호는 안혜빈을 귀국시키기로 했다. 

 “형수님, 정래의 최종판결 소식이 오는 대로 귀국을 돕겠습니다.” 


 이강은 3년 형을 선고받았다. 평양 감옥에 있다가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한 후, 형기 만료 6개월을 앞두고 1931년 봄,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동우회에서 활동하면서 흥사단 잡지 『동광』 (1931.11. 제27호)에 「평양형무소의 11공장」이라는 글을 실어 감옥 내의 실상을 고발했다. 1932년 안창호가 치안유지법으로 잡혀 와 서대문 감옥살이를 할 때, 이강 부부는 안창호의 옥중 수발을 들기 위해 형무소 앞에 단칸방을 마련하여 거주하면서 삼시 세끼 밥을 지어 날랐다. 그 후 이강 부부는 일제의 눈을 피해 다시 복건성으로 탈출했다. 이강은 진강으로 피난 온 임시정부에 복귀하여 광복군 모병 활동을 하다가 1946년 타이완에서 선무단 단장으로 귀국했다.      


 이강이 옆에 없다고 생각하니 안창호는 외로움을 느꼈다. 늘 곁에 있어 줄 것으로 믿었는데,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 버리니까 더욱 그리운 존재가 된다. 친구란 사람을 외롭게 하는 존재란 말인가?’ 

 안창호는 차리석이 일하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두 사람은 민족유일당 강령을 토론했다. 

 “지난번 미국을 순회하면서 내가 절절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오? 미국 한인사회는 거침없이 돌아가고 있었소. 그들은 노동해서 일당을 벌고, 돈을 모아 상점을 내거나 땅을 사서 농장을 경영하고, 원하는 만큼 학교에 다니고....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삶의 질이 높아져 가더이다. 그걸 보면서 나는 만주로 탈출한 동포에 대한 연민으로 내내 가슴 한 켠이 시렸다오. 미국 한인들이 나라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길들어 버리면 어쩌나 두렵더이다.”

 차리석이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포기하거나 낙망하는 것이 가장 두렵지요. 그래서 길들면 결국 나라는 없는 것이 됩니다.” 

 안창호가 이강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이강이 그랬소. 민족혼이 사라지면 나라도 영영 사라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재외동포 교육문제는 심각하오. 의무교육 제도화로 기회의 평등을 제공해야 하오.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 권리,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경제 평등보다 우선이 아닌가 싶소. 의식혁명, 그것이 인격 혁명이오. 이강은 의연하게 감옥을 잘 견디겠지?” 

 “이강 형님은 후배들의 모범이지요. 좌우 이념에 기울지 않는 의연함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도산 형님과 닮았지요. 잘 견뎌내실 것입니다. 하이난섬까지 이주한 동포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차리석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강에게 한 말이 있소. 미주 한인의 경제력과 만주 한인의 군사력, 그리고 상해와 북경의 정치력이 삼위일체가 된다면 민족혁명 전략이 완성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오. 이강이 이 말을 듣고는 독립 이후의 신국가 건설 비전을 담고 있다고 하더이다. 나는 경제와 정치의 평등, 이것을 대공주의라고 칭했소. 그랬더니 이강이 ‘옳거니! 식민지 한국 현실에 꼭 맞는 혁명이념이오.’라고 칭찬해 줍디다.”

 안창호의 말을 듣더니 차리석은 코민테른의 영향력에 대해 걱정을 토로했다. 

 “해외로 분산된 동포의 삼위일체 혁명이념. 어쩌면 약소국들의 식민지 해방이념으로써 항일 연대가 가능한 이념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문제는 모스크바 코민테른이 공산주의 이념으로 단결하도록 약소국을 압박해 오고 있어 걱정입니다. 독립혁명에 사활을 걸고 있는 우리 민족에 또 하나의 거대 공룡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소. 민족 내부의 단결과 통일이 그래서 중요하오. 이번에 추진되고 있는 민족유일당이 결성된다고 하더라도 갈 길은 멀지요. 독립전쟁을 치러야 할 테니까.” 안창호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리석이 안창호가 제기한 대공주의의 내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형님은 대공주의를 민족유일당 강령에 반영하고 싶은 거지요? 정리하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이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대적 제도확립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약소국 민족 평등으로 세계 대공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네 가지 평등을 추구하는 민족혁명 단계의 새로운 패러다임, 그것을 대공주의라고 하자.’ 맞나요?”

 안창호가 말을 이었다. “다만, 독립혁명 단계에서 우리는 항일전에서 싸울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민족혁명과 계급혁명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 모든 혁명 과정은 피압박민족의 보편적 가치와 행복을 누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

 차리석이 다시 물었다. “유일당 결성이 물리적으로 좌절된다면 도산 형님의 다음 전략은 무엇입니까?”

 안창호가 웃으며 말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으니 각 단체 지도자들은 단결을 외칠 수밖에 없겠지. 이는 어찌 보면 정치 평등의 첫걸음이오. 크고 작은 단체들이 있겠지만, 독립혁명에는 상하 귀천이 있을 수 없소. 추구하는 목적과 행동에서 평등하단 말이지. 기회의 평등. 그래서 국민대표회의가 중요하고 민족유일당이 중요했던 거요. 제도 보완을 위해 마음을 하나로 합하자. 그런데 그것이 어렵소. 만주 통합이 어떻게 될지, 가능한 단체들과 연합회라도 결성해야겠지. 중국 혁명당과도 통일 동맹을 결성해야 할 테니. 대공주의를 잘 다듬어서 이념적 근거로 제시할까 하오.” 

 차리석이 명석한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형님에 따르면 정치 평등이 민족혁명의 최상위 개념이군요. 그리고 자력으로 혁명자금을 만들어 내자. 어차피 우리의 피땀으로 생존해야 하고, 독립전쟁 자금을 만들어야 하니 이는 국민의 의무이며, 노동 앞에 우리 국민은 평등하다. 문명 부강한 신국가의 경제 제도는 민주적 공론과정에서 경제 평등 제도를 추구한다. 누구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안창호가 감탄했다. “오,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요. 미국 자본주의는 빈부 차이가 있고, 소련의 사회주의는 그것의 대안이라고 하니 앞으로 제도들이 보완되는 것을 지켜봐야겠지. 다만 현재 우리나라는 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소. 그러니 우리는 지식의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교육에 더 힘써야 할 것이오.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제도의 확립, 교육의 기회균등은 바로 교육 평등이오.”

 차리석이 잠시 생각하더니 신중하게 물었다. “경제 평등이 제일 민감한 문제 같습니다. 저도 형님이 미국에서 돌아오신 후 삼일당에서 연설하신 대로, 현 단계는 식민지 처지에서 국민 모두 빈곤한 상태이니 사유 재산을 공유하자는데 동감합니다. 그러나 부자나 자본가들에게 설득이 되겠습니까? 물론 재산을 팔아 해외기지개척에 투자한 선배들이 계시긴 하지요.”

 “그렇소. 나는 이회영 선생 일가나 이상룡 선생 일가를 존경하오. 그러나 금전 자본이 없어도 신용이나 지식의 자본은 개인이 쌓을 수 있소. 우리가 해방과 동시에 민족혁명을 달성하고자 한다면, 경제 평등이 근대적 제도확립에 있어서 핵심과제가 될 것이오. 그러니 지금은 경제의식 훈련이 필요한 때요. 나는 실업을 일으켜 자본을 모으고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도록 회사설립 운동에 주력했었지. 미주는 그것이 가능했소. 그러나 만주의 경우에는 미주 동지들의 자본으로 이상촌 부지를 제공해 주고, 거주 희망자들이 농민호조사를 결성한다면 하나의 기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 이 문제는 안정근, 손정도, 이탁과 의견 일치를 보았소. ‘해 보자!’라고.” 

 이 말을 하면서도 안창호는 남만주의 김동삼과 북만주의 김좌진을 생각했다. ‘결국에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

 차리석이 말했다. “그러셨지요. 국민대표회의가 해산되고, 형님은 만주 대표들을 위로하러 다니셨지요. 북경‧천진지부 흥사단 청년들이 앞장서 농경지를 임대하고 손정도 목사가 길림으로 이주하고. 결국은 경제부흥의 문제요, 재생산구조를 마련한다면 만주 이주민의 정착을 도울 수 있을 테지요. 유일당 강령의 핵심이 되겠군요.”

 “만주는 마침 양기탁 큰형님이 손 목사를 받쳐주고 있어 큰 힘이 될 터이고, 이제 상해 차례요. 상해에서는 직업의 다양성에 착안하여 협동조합을 구상하고 있소. 경제 실천 운동을 위한 훈련의 시작이랄까?” 안창호는 진행 상황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높였다. 

 “우선 이 운동을 흥사단 동지들과 의논하겠습니다. 경제 평등 개념이 함축되는 협동조합. 조상섭, 이유필과 의논하겠습니다. 이를 계기로 흥사단은 대공주의로 의식 무장을 해야겠습니다.” 차리석은 안창호의 의중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소. 국민 의식의 성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오. 주도권 다툼으로 동족 상전을 할 때가 아니오. 개인은 인격 혁명에 주력해야 하오. 변화되고 있는 세계 사정에 눈을 뜨고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해서 수련에 모범을 보여야 하오. 청년들에게 사표가 되어야지.” 안창호가 힘주어 말했다. 

 “그러므로 수양동우회는 정치조직을 초월하여 유구한 인격운동 단체로 남아 있어야 한다!” 차리석이 웃으며 덧붙였다. 

 안창호가 기분 좋게 결론지어 말했다. “바로 그것이오. 신간회에 속하지 않은 것은 나름 잘한 일이오. 이광수가 욕을 많이 먹겠지만, 수양동우회는 혁명당이 될 수 없소. 흥사단은 투사양성을 위한 혁명훈련단체요.”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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