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유일당운동의 수난, 김좌진과 김동삼
1928년. 안창호는 중국이 국공내전을 벗어나 항일투쟁에 집중해야만 우리 혁명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정은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국민혁명당 우한정부는 북벌 전쟁으로 인해 결국 재정난에 봉착했다. 우한정부는 재정적 불안을 공산당 지도부의 급진적 농민운동 탓으로 돌렸다. 국공합작에 균열이 생기게 된 것이다. 마침 모스크바 코민테른에서 중국공산당에 토지국유화를 시행할 것과 공산당원과 노동자농민은 무장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 전보는 우한의 국민당 우파를 자극했다. 게다가 상해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군벌을 몰아냈다. 북벌 중이던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상해에서 반공 쿠데타를 일으켰다. 우한정부는 처음에 장제스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으나, 공산당이 탈퇴함에 따라 자연히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했다. 7월 15일 우한정부는 공산당과의 합작이 깨졌음을 공식 선포하고 장제스의 남경 정부와 통합에 나섰다. 국민혁명군은 1928년 1월, 장제스에게 총지휘권을 내주었다. 4월, 장제스는 70만 명을 동원하여 제2차 북벌에 나섰다. 봉천, 직예의 북양군벌은 패주하고 봉천 군벌 장쭤린은 5월, 장제스에게 정전을 제의하고 만주로 철수했다.
만주 장악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은 산동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보호를 명목 삼아 관동군 2천 명을 주둔시켰고, 1928년 4월에는 북벌에 대비해 4천 명의 관동군을 증파했다. 장제스는 북경 입성을 위해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고 우회 작전을 펼쳤다. 관동군은 만주와 중국 본토를 분리하려는 전략을 실행했다. 일본 다나카 내각은 장쭤린에게 북경에서 퇴각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장쭤린은 이를 거부하였고, 그 대가로 일본이 꾸민 봉천 철도 폭파로 인해 폭사를 당했다. 그 덕분에 6월, 장제스의 북벌군은 북경에 무혈입성했다. 부친을 잃은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일본군부에 원한을 품은 채로 장제스의 예하 부대인 동북변방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장쭤린 폭사 사건은 1931년 9.18 만주사변의 신호탄이 되었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독자 노선을 결정했다. 이들은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1927년 7월 인민 정부 광동 코뮌을 수립하였고, 이어서 8월 1일 남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남창군관학교장 주덕의 지휘하에 약 3만 명이 새 정권 수립과 토지혁명 수행 등을 외쳤지만 3일 만에 국민당에 패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주덕과 진의가 인솔하는 공산당 주력부대는 모택동 부대가 있는 정강산 요새로 합류하여 홍군을 결성했다. 모택동은 1927년 9월 추수기를 맞아 그의 고향인 호남성에서 추수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정강산에 근거지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남창봉기 실패 후 중국공산당 긴급 간부 회의에서는 초대 서기장인 진독수를 우경 기회주의자로 규탄하고, 새 지도자로 구추백을 세워 토지혁명 완수와 국민당에 대한 무장항거를 선언했다. 중국공산당은 1927년 9월 호남성, 호북성, 하남성, 광동 등에서 추수 봉기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지도부는 실패를 인정하고 전법을 바꿔 중앙혁명 근거지와 소비에트 지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1930년에는 13개 성에 걸쳐 15개에 달하는 근거지를 확보했다. 이들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오성륜, 김산 등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들 대부분이 광동, 우한, 남경의 민족유일당촉성회에 가입했다. 1927년 12월, 이들은 한인청년동맹을 결성했고 광동 코뮌에도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 오성륜은 광동코뮌의 중앙집행위원이었다. 이들은 남창봉기가 실패하자 해륙풍으로 쫓겨났다. 해륙풍(하이펑과 루펑 지역)은 농민혁명의 성공으로 최초로 소비에트가 형성된 중국공산당의 성지였다. 이곳에는 김산이 좋아하는 인물인 펑파이가 지도자로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국민당과의 혈전으로 악전고투하였다.
여운형은 중국 언론계 지식인들과 교류를 확장하면서 중국의 현 사태를 주시했다. 김원봉은 중국국민당 고위층과 친선 교류를 유지하면서 군관학교 분교 설립과 한국 청년 입교를 위해 선전 활동을 해나갔다.
1928년 5월, 안창호는 중국 언론을 활용하는 방안을 창안했다. 중국 측에 국공내전을 벗어나 대일 전선에서 한중 협동전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하기로 한 것이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중국 국공 결렬에 영향받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마침 1923년에 신언준이 망명하여 흥사단에 입단하고 언론사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신언준(1904~1938)은 1927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으며, 중국 신문 『세계신문사』 아주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중국 언론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신언준은 『세계신문사』와 『중앙일보』에 안창호의 논설을 게재했다. 안창호는 5월, ‘중국 혁명동지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썼다. 내용은 양국의 협동전선에 대한 제안이었다. 안창호는 중국을 혁명동지로 칭했다. 무엇보다도 국민당과 공산당을 하나의 중국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양국의 합작으로 대일협동전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1928년 10월 20일 김좌진의 신민부가 있는 하얼빈시 빈주현에서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한인들 사오십 명을 신민부 군정부 보안대가 처벌, 살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태수습에 나선 최경한 등 민정파는 11월 하순 영안현에서 6개 현 16개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북만 주민대회를 개최하고 김좌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여론 악화로 김좌진의 위상은 추락했고 군정파 세력은 약화되어 1928년 12월 해체를 선언했다. 김좌진은 이미 김동삼의 혁신의회와 결합한 상황이었다. 군정파 해체에 이어 민정파도 1929년 3월 해체를 선언했다.
또한 참의부 심용준과 정의부 현익철 등은 자치행정과 유일당을 분리한다는 조건으로 5월에 국민부를 따로 결성하고 흥경에 본부를 설치했다. 국민부는 3부 통합에 참여했다. 안창호와 양기탁은 김좌진과 따로 만나 신민부 재결합과 3부 통합을 협의했으나 때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김동삼의 노력과 김좌진이 참여한 혁신의회는 국민부 탄생으로 무력해지고 만주유일당 계획은 무산되었다. 김동삼은 좌우합작 재시도를 위해 1929년 4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5월이 되자 유일당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김좌진은 김동삼의 혁신의회가 실패하자 별도로 신민부 지역인 중동선 일대를 기반으로 1929년 7월, 무정부주의 세력인 사촌 동생 김종진, 이을규(1894) 등과 함께 북만주 유일당 자치조직으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여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보류하고 반공산주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들은 “완전독립과 민족해방, 민생안정과 혁명훈련 실시, 혁명 민중조직 완성”을 강령으로, 이를 위해서는 폭력 운동을 실행하고, 민중은 혁명화, 혁명은 군사화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삼았다. 또 합법운동과 기회주의자 박멸, 반민중적 정치 운동이론 배척, 파벌 청산, 노선통일, 우익단체와 친선 도모, 세계 흐름에 보조를 맞추고 연대하기 등을 추진했다. 김좌진은 농촌자치조직을 강화하고 실업 증진을 위해 산시참(山市站)에 정미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또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사상과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김좌진은 노동강습소, 북만중학교 등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면서 틈틈이 안창호가 말해온 이상촌을 형성할 토지를 확보해 나갔다.
김좌진과 홍진은 안창호의 만주 이상촌 사업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1929년 만주에 정착한 홍진은 김좌진, 황학수, 지청천, 이장녕 등과 흑룡강성 우창현에 농지를 마련하여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근거지를 확보했다. 생육사는 만주 일대 빈민 한인들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고 독립군양성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설립된 실업 기관이었다. 홍진과 김좌진은 만주 이상촌 사업을 협력해 나갔다. 그러나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당 청년동맹 박상실이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장엄한 일생을 마치게 된다. 조선총독부 문서에 의하면 빈주 사건의 피해자 유족과 재중청년동맹이 계획한 일이었다. 김좌진의 사촌 동생 김종진도 이듬해인 1931년 중동선 해림역 근처에서 공산당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홍진은 김좌진의 순국 이후 한족총연합회를 한족자치연합회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이를 모체로 1930년 7월, 만주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다. 만주한국독립당은 산하에 군민회의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김동삼, 부위원장에는 홍진을 선임하였다. 김동삼의 혁신의회는 비로소 1930년 7월 홍진, 황학수, 지청천 등이 추진한 만주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된 것이다. 만주한국독립당은 한국 독립군을 창설하였으며, 김동삼은 고문으로 물러났다. 군민회의는 이듬해 만주사변 때 김동삼의 체포로 활동이 침체되지만, 홍진이 사태를 수습한 뒤 지청천, 신숙, 황학수 등과 한국독립당의 당세를 확장해 나갔다.
김동삼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때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안동 인척 이원일과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과 함께 항일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체포된 것이다. 김동삼은 이원일과 함께 신의주를 거쳐 평양지방법원에서 모진 고문 끝에 10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평양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서울 마포 경성 감옥으로 이감되어 1937년 4월 13일(3월 3일 음력) 59세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한다. 만주의 위대한 큰 별, 서간도의 호랑이 김동삼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민족유일당을 지지하던 공산당 세력은 모스크바 코민테른 12월 테제(1928.12.10.)의 명령에 따라 1929년 7월에 유일당촉성회연합회를 공식 탈퇴했다. 민족주의자를 민족부르주아 세력으로 규정하고,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그 영향으로 1929년 10월 26일, 유일당상해촉성회가 해체를 선언했다. 이어서 1930년 2월, 남경촉성회도 해체를 선언했다. 민족유일당 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상해촉성회가 해체되던 날, 좌파 세력은 따로 모여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상해한인청년동맹과 통합하여 상해한인반제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지지하며 중국혁명 대중과 합작하며 이에 단결한다.”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1936년에 가서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거나 남경에서 김성숙과 손두환이 주도한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에 가입했다. 그러다가 이들 대부분 1938년 10월,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로 흡수되었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5월 18일, 광복군 제1지대로, 나머지 주력부대는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 휘하 조선의용군으로 확대 개편된다.
상해촉성회 우파세력은 한국독립당 창당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25일 임시정부의 우파정당으로 창당된다.
남만주 국민부는 좌파 이탈 상태에서 1929년 12월 10일 조선혁명당을 창설했다. 산하 독립군은 조선혁명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혁명당, 국민부, 조선혁명군으로 구성된 3기관의 조직과 운영을 조선혁명당이 주도함으로써 이당치국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혁명당은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하고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만주사변에 대응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여 나갔다.
이렇게 만주 3부 통합운동도 좌우합작에는 실패하였으나 각각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창당으로 이당치국 체제를 위한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남만주에는 조선혁명당이 결성되어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통솔하는 이당치국 체제로 돌입했고, 동북만주는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어 군민회의와 한국독립군을 통솔하는 이당치국 체제를 결성했다. 1931년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은 양세봉이고,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은 지청천이었다. 양세봉은 1934년 8월, 일본 관동군 대 병력과 싸우다가 밀정의 고발로 일본군에 사살되어 장렬한 죽음을 맞았고, 지청천은 1940년 중경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된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