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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May 12. 2023

제10장. 낙심마오 #4/10

4화. 상해, 한국독립당 창당

 4화. 상해, 한국독립당 창당

        

 1930년 1월, 임시정부에는 이동녕, 김구, 조완구, 김철, 조소앙, 이시영, 엄항섭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좌우합작의 민족유일당운동이 결렬되자 한국독립당 결성을 추진하기로 했다. 유일당운동을 선도해 온 안창호는 다소 조급해진 마음을 눌렀다. 안창호는 이유필과 차리석을 앞장세워 흥사단 동지들과 긴밀한 회합을 열고 한국독립당 참여에 의견을 모았다. 비록 좌파계열이 빠진 정당이었지만, 흥사단 인사들은 한국독립당을 통해 안창호의 대공주의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른바 항일전선에서 이념을 초월하여 계층과 계급의 협동을 끌어내고,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신국가 건설 비전을 제시하기로 숙의했다. 또한, 민족 평등의 관점에서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재정립하고, 항일전선의 연대를 끌어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1930년 1월 25일, 상해에서 민족주의자 28명이 발기회를 구성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김철, 김홍서, 차리석, 송병조, 조상섭, 선우혁, 박찬익, 한진교, 윤기섭, 김갑, 김붕준, 박창세, 백기준, 이유필, 김두봉, 안공근, 조완구, 최석형, 장덕로, 이탁, 강창제, 조소앙, 옥관빈 등이 중심이 되었다. 1930년 12월, 상해로 이주한 양기탁도 한국독립당에 가입했다. 양기탁이 합류함으로써 이동녕, 이시영 등 원로급 인사들의 활동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동녕, 조소앙, 조완구, 이유필, 김두봉, 안공근과 함께 한국독립당 강령 기초위원에 선출되었다. 조소앙이 3균 주의에 입각한 기초안을 내놓았다. 안창호는 민족유일당 강령으로 구상했던 대공주의의 철학과 정책을 역설했다. 숙의 토론 끝에 <한국독립당은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며,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신민주국을 건설하고, 안으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 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과 국가 간의 평등을 실현하여, 나아가서 세계 일가의 진로로 향한다.>라고 전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민족유일당에 기반한 이당치국의 구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매듭짓기는 이르다. 새로 시작하자.’ 

 1930년 1월 중순, 안창호는 천진에 머물면서 유일당 원칙에 찬성하는 단체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통일운동 재시도에 들어간 것이다. 우선 흥사단 북경천진지부 청년들과 천진불변단의 인사들과 회합을 시작했다. 

 천진불변단은 1919년 4월에 결성된 단체로 일본 기관파괴와 침략 원흉 제거가 목적인 의열단 조직이다. 1919년 8월 15일 재편된 조직에는 단장 명제세, 부단장 박환, 총무 조선홍, 서무 김정, 재무 독고감, 교통 박용태, 군무 신명화 외에도 박세충, 박환, 조방걸, 이경생, 인재걸, 김태준 등 55명이 활동했다. 

 이들은 상해 구국모험단에 버금가는 조직체로 임시정부, 특히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를 지지했다. 이들 주요 인사들은 1920년 3월, 국내로 잠입하여 대동단, 대한독립애국단 등과 결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통합을 기념하는 제2차 만세시위를 추진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1920년 3월, 통합임시정부 지방선전 총판에 임명되어 북경에 파견되었을 때 이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그해 8월, 미의원단 한국 방문 때 천진불변단은 작탄 거사에 동참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 등 주요 기관파괴와 친일관료를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하는 등 구국모험단과 연합하여 무력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북경 ‧ 천진 지역 단체 지도자들과 회합을 재개하면서, 통일운동의 좌절 끝에 창안하고 정립한 대공주의를 내세웠다. 대공주의에 입각한 통일대당의 전략으로 단체결성을 시도한 것이다. 유일당운동에 동참했던 지사들이 호응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을 규합하여 1930년 1월 한인각단체연합회를 조직했다. 1월 25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기 직전이었다. 

 안창호는 정치적 평등 이념으로 한인각단체연합회 조직 강령을 구상했다. 평등의 원리와 주인 정신이 강조되었다. 안창호는 이 강령에서 혁명이론의 기본원칙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우리는 피압박민족인 동시에 피압박 계급이므로 민족적 해방과 계급적 해방을 아울러 얻기 위하여 싸우자. 싸움의 대상은 오직 일본 제국주의임을 인식하자. 둘째,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수단은 대중의 소극적 반항운동과 특별한 조직으로 적극적 폭력과 파괴를 중심으로 하여 선전 조직 훈련 등을 실행하며 실제 투쟁을 간단없이 하자. 셋째,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에서 해방된 이후에는 경제와 정치와 교육 평등의 기본원칙을 수립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하자. 넷째,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전 세계 인류에 대공주의를 실현하자.’

 그러나 한인각단체연합회는 임시정부의 반대로 2월 말에 해산되고 말았다.      


 3월 말, 안창호는 천진시 화평구 남경로 36호 2층으로 찾아가 박용태(1888~1938)를 만났다. 박용태는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3.1운동 후 천진으로 망명하여 항일결사 천진불변단을 조직한 인물이었다. 1921년 3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4년 4월 26일 출옥했다. 그 후 국내에서 대종교진흥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다시 1926년 7월에 천진으로 망명하여 배일 활동을 목적으로 천진한교동지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박용태가 말했다. “각하, 유일당이 절반의 성공으로 자평할 수 있다고는 하나, 우파끼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것은 결국 절반의 실패요, 실패의 과제를 떠안은 꼴입니다. 상해는 조금 조급한 듯합니다. 임시정부는 한인각단체연합회도 해산하라 했다지요? 통일을 포기했나요?”

 안창호는 다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동감이오. 그러나 통일을 포기한 것은 아닐 것이오. 기회를 두고 보자는 것이겠지요.”

 박용태가 말했다. “공산주의자는 코민테른 지시를 따른다고 치지만, 여타의 민족진영 단체들은 불구경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각하의 말씀대로 힘을 길러야 하는데, 자력이 힘들면 연합전선,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공산주의니 민족주의니 하는 노선 문제가 대립 구도로 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동감이오. 더구나 양자구도와 관계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치고자 결심한 단체들도 많지요. 역시, 각단체연합회는 부활시킬 필요가 있소. 박 동지가 그 일을 해주시오. 솔직히 말해 나는 의지와 다르게 실패만 거듭했소. 이제부터는 뒤에서 따라가리다!” 안창호가 결연히 말했다.

 한국독립당의 주 세력은 이동녕과 조완구, 조소앙을 비롯한 보수 인사들이었다. 안창호는 흥사단 동지들이 정당 내부에서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좌우 균형이 아닌, 계파 균형을 의미했다. 이들은 이를테면 정부 여당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견제할 야당이 필요하다. 야당은 단체연합으로 구성된 정당조직이어야 한다. ‘정치평등 구조의 확립’인 셈이었다.

 박용태는 ‘정치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안창호의 깊은 속뜻을 알아차렸다. 

 “각하, 무슨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정치의 뜻을 펼칠 균형 세력이 필요하지요. 제가 앞장 서보지요. 천진에 산재한 단체들부터 만나야겠습니다. 결성할 단체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

 “음, 한인각단체연합은 좌절되었으니... 한국독립당에 비준하는 대한독립당은 어떻소? 주비회를 구성하는 데 앞장 서주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안창호는 한국독립당을 견제하는 야당 단일체로 대한독립당이 기능할 수 있기를 바랐다.

 “대한독립당, 좋습니다. 각하, 주비회과정에서 기관지를 발행하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만....”

 “기관지 발행이라. 그거 좋은 생각이오. 혹시 생각해 둔 제호가 있소?”

 “이름 짓기가 도산 각하의 특기라는 소리를 풍문으로 들었지만, 하하. 『조선지혈』 은 어떻습니까? 그전부터 생각해둔 것입니다. ‘조선의 혈.’ 일본이 조선의 혈을 건드리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지요. 목적과 표적이 분명하지요?”

 “하하하. 아주 흡족하오. 천진불변단 느낌도 사는구려. 이름에 향기와 철학이 있소.”

 “이렇게 칭찬해 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럼 동지들과 『조선지혈』 창간을 의논해 보겠습니다. 도산 각하께서 첫 운을 글로 써 주셔야 할 것입니다.”

 “나도 기회가 되면 중국 지식인을 향해서 할 말이 있다오. ‘한중혁명의 공동의 적은 일본이다. 그러니 한국과 항일운동 전선을 통일하자.’ 이런 말을 외치고 싶소.”


 안창호는 박용태와 협의한 대로 독립운동 단체의 일원화를 기약했다. 1930년 4월 5일, 안창호는 박용태를 앞장세워 국내외 한민족의 대동단결과 연합작전을 선전했다. 또, 만주와 노령, 미주 각지 운동단체 대표대회를 6월 초순에 천진에서 개최하자고 통고문을 발송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했다. 다만, 대한독립당 기관지 『조선지혈』 창간호(1930.6.15.) 지면을 통해, 일본을 한중혁명의 공동의 적으로 규정하고 민족유일당 조직을 완성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당치국의 정치혁명으로 임시정부를 개조하려고 했던 안창호의 노력은 각 처에서 정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남만주 국민부의 조선혁명당(1929.12.10. 현익철, 최동오, 양세봉)과 상해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1930.1.25. 이유필, 조소앙) 창당 이래, 서북만주 한국독립당(1930.7. 김동삼, 홍진. 지청천)이 창당되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 진보를 내세운 한국혁명당(1929년 윤기섭, 신익희)과 박용태의 대한독립당이 창당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김원봉 계의 조선의열단과 김규식의 상해 한국광복동지회도 창당되었다.

 1930년, 안창호는 상해에 머물면서 청년과 여성층을 상대로 정당 결성에 집중했다. 상해한인애국부인회, 한인여자청년동맹(8월), 상해한인청년당, 상해한인소년동맹 등의 단체가 속속 결성되었다. 임시정부 외곽에서 한국독립당을 견제하면서도 임시정부의 정책에 참여하고 지원하는 정당구조로 조직을 구성했다. 이는 각 단체의 정치참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정치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안창호는 이들 각 단체를 통합하면 야당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임시정부가 반대했던 한인각단체연합회는 국민의 정치의식 고양에 꼭 필요한 조직의 요소였다. 안창호는 한인각단체연합회의 임시정부 참여를 통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정치평등의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이미 무산된 민족유일당의 대안이기도 했다. 1931년 7월 18일, 상해 한인각단체연합회는 마침내 재결성된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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