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파리평화회의와 외교 노선
샌프란시스코 국민회관으로 돌아와 업무에 복귀한 안창호 앞으로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재관과 안정근의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홍언이 편지를 전했다. “형님, 이 편지보고서들은 동지들의 애환이 묻어있어 그런지 서책보다 훨씬 더 값진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 사료처럼 말이죠.”
안창호가 정재관의 편지부터 개봉하면서 말했다. “고독한 항일투쟁의 삶이 담겨있으니 보물보다 더 값지다 할 수 있지요.”
홍언이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편지를 보다가 울지는 마세요. 형님은 눈물이 너무 많으십니다. 하지만 형님의 눈물엔 이성과 냉정함도 섞여 있지요. 아니지, 사랑이 더 먼저지.”
“생각해 보오. 정재관이나 안정근이나 그 이름만 들어도 슬프지 않소? 그 아우들의 슬픈 인생에 개입할 수 없으니 서러운 것이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욱 그리운가 보오.”
안창호가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정재관의 활동 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1917년 11월 중순 러시아혁명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혁명의 여파가 극동까지 밀려와 연해주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시베리아와 연해주는 일본군이 주둔해 있는 상황이었고, 혁명군은 백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이중 전투를 해야만 했다. 이때 한인들은 항일빨치산부대를 조직하여 적군을 도왔다. 그러나 1914년 1차 대전의 영향으로 권업회가 해체되면서 새로 구성되었던 민족진영 대한광복군정부는 정치적 중립을 선언할 필요가 제기되어 9월에 해체를 선언했다. 그 대안으로 정재관, 윤해, 문창범 등 고려인 단체 대표 100여 명은 1917년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11일간에 걸친 난상토론 끝에 우수리스크에서 고려국민회를 결성하고, 1918년 6월에 니콜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로 명칭을 바꿔 제2차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20만 명에 달하는 전 고려인을 위한 해외 정부 조직의 필요성을 논의했다.”
안창호는 홍언에게 편지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정재관 동지의 고충이 고스란히 담겨있소. 미주 공립협회에서 결성한 신고려회가 연해주에서 권업회와 갈등하더니 대한광복군정부로 통합되고, 대한광복군정부가 공산주의 노선과 갈등하다가 고려국민회로 민족진영과 통합을 했는데, 윤해 등을 배려해 단체명칭을 전로한족중앙총회로 결정하고 마침내 2차 대회를 마쳤다는군. 정재관 아우의 통합능력은 대단히 훌륭하오. 미주에서도 공립협회를 하와이 합성협회와 통합해서 국민회로 발전시키지 않았소? ”
홍언이 안창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도산의 기억력은 역사 기록과도 같다. 공립협회 동지가 연해주와 북만주에서도 통합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안창호가 이번엔 안정근의 편지를 개봉해서 읽었다. 1918년 6월 26일, 이동휘와 박애, 김립, 박진순 등이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는데 자신은 유동열과 함께 가입 권유를 받기는 했으나 유동열은 가입했고, 자신은 생각 차이로 가입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 후 안정근은 상해로 이주했다. 상해에는 신규식의 조선사회당이 있었는데 스웨덴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 대표파견 이후로 이렇다 할 활동이 없는 상태였다. 이 가운데 1918년 8월 여운형, 선우혁, 김철, 한진교, 조동호, 장덕수 등 6인이 튀르키예 청년당을 모방하여 신한청년당을 발족했다. 신한청년당의 당수는 여운형이고, 강령은 대한독립 ‧ 사회개량 ‧ 세계대동 3가지로 압축되며, 취지서에는 ‘대한독립의 완성’, ‘학술과 산업 발전을 통한 민족의 힘 기르기’, ‘신문화로 전 인류에 기여’ 등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고 했다. 특히 청년들은 1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국제질서의 재편 기회를 살려 외교에 주력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김규식을 강화회의 참석 대표로 잠정 선정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인맥은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활동에서 드러난 진보성향의 민족운동가들이 주류였고, 안정근은 이들의 이념에 공감하여 신한청년당에 가입할 것이라 했다.
안창호는 편지 내용을 홍언에게 전달했다. 홍언이 편지를 훑어보면서 말했다. “원동에서는 한인사회당, 조선사회당, 신한청년당 등 정당 형식으로 정치결사 단체가 조직되고 있군요. 러시아혁명의 영향이겠지요?”
안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미주 상황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있는 것 같소.”
홍언이 중얼거렸다. “미국 개입으로 전쟁이 종결되면 세계질서가 어떻게 재편될까요? 청년들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네요.”
안창호는 청년들이 결성한 신한청년당의 이념에 공감했다. “안정근이 말하고 있는 신한청년당이 주목되오.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동지들이 많이 속해 있다면 내 생각과 비슷하겠지. 다만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궁금한데.... 외교전에 필요한 많은 자금은 어떻게 조달하려나?”
홍언이 말했다. “흠, 현재로선 미주 한인의 단결이 중요하겠지요. 미주에서 노력해 주어야겠지요.”
“그렇겠지. 현재로서는....”
안창호는 안정근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편지 속에 등장한 선우혁 형제를 떠올렸다. 대성학교 제자로서 신민회 활동에 적극적이던 선우혁과 제 형을 따라다니던 꼬마 선우훈. 안창호는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의 승전으로 끝났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전쟁 종결과 우리의 할 일’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고, 북미, 하와이, 멕시코 지방총회와 동포들에게 일치단결하라는 권고문을 보냈다.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국민회관에서 중앙총회 임원 회의를 개최하고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모색했다. 먼저 1918년 12월 14~15일 뉴욕에서 열리는 제2차 약소국동맹회의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평화회의에 한국 대표 파송을 결정했다. 중앙총회가 결정한 대표는 하와이 이승만과 미주 중서부의 정한경 그리고 서북미의 민찬호였다. 제1차 뉴욕 약소국동맹회의에 참석했던 박용만을 이승만으로 교체한 것인데, 이승만은 뉴욕회의에 불참하고 대신 하와이에 있다가 파리평화회의 대표로 가기 위해 정한경, 민찬호와 합류하여 여행권을 신청했다. 그러나 워싱턴 정부는 비자와 여행 증명서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미국이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생각해서 내린 조치였다.
1918년 12월 23일 샌프란시스코 국민회관. 총회장 안창호는 회의를 소집했다. 홍언, 곽림대, 백일규, 이대위, 황사선, 송종익, 김홍균, 김종림, 양주은, 김항주 그리고 뉴욕회의에 참석했던 민찬호와 정한경도 참석했다. 백일규를 만장일치로 임시 의장에 선임했다. 백일규가 회의를 진행했다.
본회의에 앞서 제2차 뉴욕 약소국동맹회에 참석했던 민찬호의 보고를 들었다.
“참가국들은 이번 전쟁의 종결이 제국주의의 종말이며 미국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인정했습니다. 리투아니아, 폴란드, 알바니아, 앗시리아, 그리스, 인도, 아일랜드, 페르시아, 스콧트랜드, 우크라이나 등 약소국들은 한목소리로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자국의 목소리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적극적인 외교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고 했습니다. 동맹과 연대의 중요성도 제기되었지요. 한국도 일본제국으로부터 절대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러한 약소국동맹회의는 연합통신(AP)을 통해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일본 고베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시사잡지에는 ‘한국민들, 독립을 주장’,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 요구’라는 기사가 실렸다고 들었습니다. 재일본 청년 유학생들은 독립운동에 크게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총회장 안창호가 민찬호의 보고에 화답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파리까지 가셔야 하는데 비자와 여행권 발급이 좌절되다니요. 안타깝습니다. 미국도 별수 없나 봅니다. 우리가 나라 빼앗긴 수모를 미국에서 겪다니요. 약소국들이 연합하는 것도 힘이요, 우리는 그 길을 모색한 겁니다. 강대국들은 힘이 팽창하면 언제든 전쟁을 다시 할 것이오. 태평양을 끼고 있는 미국과 일본이 그러는 때가 오지 말란 법이 없소. 우리는 민족의 힘을 키우고 약소국과 동맹할 수 있는 외교력에도 전심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민찬호가 말했다. “여기 정한경 대표도 같이 계시지만 이승만 박사는 몇 가지 대안을 제시했지요. 캐나다를 경유하여 비밀 출국을 시도한다. 안되면 파리에 가 있는 헐버트 박사에게 우리 문제를 위임하여 제출하게 한다. 그것도 불가하다면 윌슨 대통령에게 직접 만나 원조를 청한다.”
안창호가 답했다. “제 소견으로는 세 가지 제안이 다 불가합니다. 더구나 외국인에게 우리 문제를 위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을 면회할 수 있다면 출국 허가문제의 도움을 청해보는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대위 북미총회장이 발언을 이었다. “윌슨 대통령이 중요합니다. 러시아는 레닌이 혁명에 성공하여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을 수립하고 그 세력을 약소국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과 한국은 제국주의에 시달려 왔던 민족이오. 그들이 민족해방을 지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한국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승만 박사가 그 소리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정한경이 입을 열었다. “나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사정을 가까이 지내는 정치학 지도교수와 의논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한국 국민이 자발적인 아무런 거동이 없는 상태에서 해외에 있는 대표자의 청구는 의안으로 제출되지 못할 것’이라고 일침을 줍디다.” 정한경은 그 교수가 ‘차라리 연합국에 위임통치를 요구하면 어떤가’라고 말했던 것은 총회에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한경은 이를 이승만에게는 이미 전달한 상태였다.
황사선이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일본의 불법 통치와 잔혹한 진상을 어떻게든 폭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약소국이니 더 조심할 게 무엇입니까? 우리는 외지인일 뿐입니다. 국내의 저항 움직임이 세계에 알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 신민회사건을 겪은 황사선 동지의 말은 그러한 대사건을 국내에서 다시 일어나게 해서 국제사회에 알려야 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안창호는 감탄했다. ‘맞다.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지금은 탈제국주의 시대로 가고 있으니 그런 잔혹한 사건이 일어난다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다. 중근이 해낸 위업처럼 의열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민중적 저항운동!’ 안창호는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이런 일은 미국에서 의논할 일이 아니다. 중국으로 가봐야 한다. 거기에는 과거 동지들이 많이 있다.’
“세계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독립운동도 매우 복잡해질 것입니다. 아무리 미국이 일본과 더불어 승전연합국이라지만 윌슨 대통령이 우리가 파견하는 대표의 여행권을 제한하는 것 또한, 큰 실수지요. 국민회중앙총회가 세계통일기관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시베리아와 만주 사정을 통솔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미주에서는 하와이총회가 분열하고 있고. 도산께서 파리평화회의 대표로 직접 움직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곽림대의 뜻밖의 발언에 안창호는 당황했다.
안창호는 말을 아꼈다. “아닙니다. 인제 와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윌슨 대통령과의 소통에는 이 박사가 적임자요. 그를 믿고 나라의 큰일을 맡깁시다.”
이때 민찬호가 손을 들고 발언을 청했다. “여러분, 저는 이번 3인 대표에서 빼 주십시오. 아무래도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이유는 개인 사정으로 해 두시지요.”
민찬호는 정한경이 위임통치안을 이승만에게 전달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위임통치안이 많은 공분을 사게 될 것을 예상하고 공개발언을 생략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도산에게 이를 전달해야 한다. 공개 석상은 곤란하다.’
안창호는 민찬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무슨 사정이 생긴 게로군. 이승만과 갈등하고 있나?’
백일규가 나섰다. “민찬호 대표에게 사정이 생겼다면 봐 드려야 하겠지요. 여러분의 생각도 같습니까?”
임시의장의 말에 다들 이의는 없었다. 정한경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백일규는 안창호의 표정을 살폈다. 안창호는 동의했다.
홍언이 발언을 이어갔다. “이번 중앙총회의 대표파견 소식을 일단 전 세계 국민회에 전달해야 하겠습니다. ‘파리 평화회의와 소약국동맹회 대표파견처럼 우리 민족에게 큰 사건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땅이 멀고 때가 촉박하니 한자리에 다 같이 모일 수 없어 북미주 지방 대표들이 모여 이승만과 정한경의 대표파견을 결정하였노라.’”
“그게 좋겠습니다. 대표파견을 알려야 하니까요.” 모두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백일규가 새해 1월 17일까지 총회장 안창호 이름으로 파리회의에 보낼 문구를 영문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는 북미주 재류 한인 2천 5백 명, 멕시코 한인 1천 명, 하와이 한인 5천 명, 원동 한인 150만 명을 통일하여 조직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특별위원회의 가결을 경유하여 이승만, 정한경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전권 대표자로 파견한다.” 이 위임장은 1919년 1월 27일 자로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회의가 끝난 후 민찬호가 안창호를 따로 찾아와 속 이야기를 털어놨다. ‘위임통치 청원 건’에 대한 토론이 오고 갔다.
안창호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위임통치 청원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청원이 알려지면 국민회중앙총회는 있으나 마나 한 단체가 된다. 또한, 독립운동계의 통일은 더욱 불가능하게 된다. 가뜩이나 러시아와 만주의 국민회지방총회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소멸하고 있고, 심지어 미주도 하와이와 북미가 통합이 어려운데 세계통일기관 중앙총회는 허울만 남을 것이다.’ 이미 깊은 강을 위태롭게 건너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안창호는 잠시 시름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중요한 때에 서재필, 이승만과 자리를 같이하여 앞날을 의논할 수만 있다면 큰 힘이 될 텐데.... 내가 이승만을 품고 가야 하나?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국민회와 흥사단 그리고 북미실업주식회사를 미주 동지들에게 맡기고 신민회 동지들이 있는 중국으로 가자.’
1919년 기미년 새해가 밝았다. 안창호는 리버사이드에서 기미년 새해 아침을 맞이했다. 1917년에 홍언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도산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홍언은 흥사단 조직 관리와 『신한민보』 편집을 맡음과 동시에, 안중근 ‧ 안창호 ‧ 이갑 등의 약전을 이야기로 꾸며 연재하는 일에 열중했다. 수산과 수라는 아빠보다 홍언을 더 잘 따랐다. 홍언은 도산의 집을 ‘도산의 꽃동산’으로 명명하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안창호는 이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흐뭇해졌다. 가족의 평화와 행복.
안창호는 ‘나는 또 멀리 길을 떠나야 한다. 아마도 오래 걸릴 것이다. 혜련에게는 또 죄를 짓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오지만 그래도 떠나야만 한다. 치국평천하를 위해서 이 한 몸을 조국독립에 바쳐야 내 마음이 행복하고 가족의 진정한 행복도 지킬 수 있다.’ 안창호는 마음이 바빴다. 중국으로 가려면 우선 국민회, 중앙총회, 북미실업주식회사, 흥사단 일에 각 적임자를 골라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중요했다.
‘국민회는 이대위가 있고, 중앙총회 후임은 백일규가 있다. 흥사단과 북미실업주식회사는 홍언과 송종익, 임준기에게 맡기면 된다. 위임한다는 것은 영혼을 비우는 것, 나 아니면 안 된다는 허위의식을 버리는 것, 욕망도 거짓도 버리는 것. 그리고 이제는 청년들을 도와야 한다. 메리다를 지키는 이종오 선생처럼 묵묵하게. 그러니 중국으로 가서 진행할 일들을 꼼꼼히 정리해야 한다. 대한의 독립이 멀지 않다. 중요한 때다. 작은 일도 큰일도 모두 사람이 하는 것이다. 능력껏 각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난 돌, 둥근 돌을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미주에서 내가 챙기고 있는 모든 일은 결국 대한의 독립에 필요한 기초를 쌓고자 했던 일들이다. 멀리 오래 있으면 마음도 열정도 시들기 마련이다. 중국으로 가자. 조국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중국으로 가면 흥사단부터 설립할 것이다. 실업을 일으키고 기지를 개척해서 한인들의 모범 공동체를 만들 것이다. 교육 훈련기관, 자아 혁신. 신성단결. 일꾼양성!’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