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신한청년당의 외교 활동
1919년. 불혹의 나이. 안창호의 몸은 많이 상해 있었고 체력도 저하되어 있었다. 안창호는 정좌하고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멀리 떠나서 오래 있으려면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 거짓없이.’
1월 하순. 김규식과 여운홍의 편지가 흥사단회관 주소로 도착했다. 안창호는 이 두 통의 편지를 마침 홍언과 함께 보았다. 먼저 여운홍의 두툼한 봉투부터 열었다. 여운홍은 여운형의 동생이며 경신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1913년 도미 유학 명단에 올랐던 여운홍은 ‘도산 선생님께 감사’라는 서두로 편지를 썼다. 오하이오주 우스터대학을 졸업하고 형님 여운형의 지시로 동경을 거쳐 상해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에는 <대한독립선언문>과 함께 연서자 명단을 올려야 하므로 미주 원로들의 가부의 뜻을 전해달라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운형의 안부와 함께 ‘거국적인 국내 만세운동 계획과 배경설명’을 전했다.
안창호와 홍언은 흥분했다. “당연히 연서에 이름을 올려야지요.”
“국민회 대표 인물이 올라야겠군요. 그렇다면, 형님과 박용만과 이대위. 제가 여운홍에게 그렇게 회신을 보내겠습니다.” 홍언이 약속했다.
“좋습니다. 이승만에게도 일단 알립시다.” 안창호는 이승만을 챙겼다. ‘이럴 때 미주의 대동단결이 필요하다.’
홍언이 선언문 전문을 읽고 나서 말했다. “<대한독립선언문>은 조소앙의 글솜씨군요. ‘자주독립국’을 천명하고 ‘대한은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역사를 가진 대한민족이 스스로 일어나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일은 정당한 권리다. 육탄혈전. 이 보오, 아우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소?” 안창호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러한 독립선언의 의지를 세계로 알려 파리강화회의까지 전달하겠다는 것이지요.”
“국제정세의 흐름을 잘 이용해서 대한독립 의지를 세계로 표출하는 것은 시의적절한 외교 전술이오. 여운형이 대단하지 않소?” 안창호는 여운형을 칭찬했다.
홍언이 미소를 띈 채 이번엔 김규식의 편지를 안창호에게 건넸다. “두 분이 자주 서신을 교환하시니 보기 좋습니다.”
김규식은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파리행을 앞두고 이 편지를 쓴다고 했다. 편지 서두에 1919년 1월 21일 고종 승하를 애도한다는 전언과 함께 숨 가쁘게 소식을 나열했다. 김규식은 몽골에서 부인과 사별했으며, 부인이 떠나면서 친구 김순애를 찾아서 재혼하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파리행을 앞두고 몽골에서 나와 남경에서 김순애와 결혼했다. 김순애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할 도산에게 이 소식을 특별히 알린다고 했다.
안창호는 기뻤다. ‘아, 이렇게 인연이 맺어지다니 얼마나 좋은가. 김순애가 누구인가! 김필순의 여동생이다. 김필순은 치치하얼에서 잘 있겠지. 그리고 이태준! 이태준은 울란바토르에서 병원을 차리고 몽골 왕의 총애를 받는다고!’
김규식은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계획하고 있는 거국적인 만세운동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여운형은 1918년 12월 15일경 상해에서 윌슨 대통령의 중국 특사 크레인을 방문하고 외교전을 펼쳤다. 크레인은 ‘개막이 임박한 파리강화회의는 특히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주도권을 가진 평화회의에 ‘조선독립의 진정서를 제출하고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함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모두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어 일본의 방해가 예견되니 ‘세계 기자단의 관심을 끌 만한 조선 민중의 저항 이슈가 필요할 것’이라고 암시했다. 여운형은 이 내용을 동지들과 긴급히 의논했다. 그리고 계획을 짰다. 파리파견은 김규식으로 정하고, 조동호와 장덕수, 여운형이 진정서를 13개 조항으로 정리 작성하여 크레인 측에 전하면서 우리나라 대표가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크레인 측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이 일을 서둘러 추진하기 위해 김규식과 조소앙을 찾아갔다. 여운형은 외몽골 울란바토르로 김규식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면서 파리파견을 준비하라고 권했다. 김규식은 동의했다.”
홍언이 감탄조로 물었다. “여운형은 정말 뛰어난 인물이군요. 여운홍의 형님이라고요?”
안창호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작년 말 안정근이 신한청년당 소식을 전해왔을 때 여운형이 당수라고 하더이다. 새 인물이 등장한 거요.”
홍언이 농담 섞인 투로 말했다. “크레인 측과 소통했다는 얘기는 영어를 잘하는 인물인가 본데... 일의 기획이 치밀한 것을 보면, 차세대 지도자가 틀림없군요! 형님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안창호가 여운홍의 편지를 다시 펼쳐보며 말했다. “결국, 여운홍과 김규식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렇게 정리가 되는 셈이오. 여운형은 길림 독립군부대 부령 직책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소앙을 찾아가 급하게 <대한독립선언문> 작성을 부탁했다. 조소앙은 여운형과 토론을 거쳐 그의 소신대로 <대한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선언문 내용은 ‘대한민족은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고, 육탄혈전을 예고함’으로 결론을 맺었다. 여운형은 이 선언문을 동생 여운홍에게 보내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중앙총회에 알리고, 적어도 안창호, 박용만, 이대위 등의 서명을 받아 동경을 거쳐 상해로 오라고 지시했다.”
홍언은 여운형 청년 당수의 다음 계획이 궁금하다고 재촉했다. 안창호는 계속했다.
“여운형은 이 선언문을 가지고 2주간에 걸쳐 간도와 시베리아, 연해주 등을 돌며 김교헌, 김약연, 김학만, 정재관, 문창범, 이동녕, 이동휘, 윤세복, 황상규, 김좌진, 여준 등과 회동하고 연서를 받는다. 조소앙도 남만주 서로군정서를 찾아가 김동삼, 이시영, 유동열, 이범윤, 이상룡, 박찬익, 손일민 등의 연서를 받는다. 상해는 이광, 박은식, 신채호, 안정근 등에게 알린다. 여운형과 조소앙은 1919년 2월 1일, 만주 화룡현 대종교 총본사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할 예정이다. 이날은 김규식이 파리로 떠나는 날이기도 하다.”
안창호가 명단을 훑어보며 8도 출신들이 망라되었음을 간파했다. “대부분 공화주의자이며 신민회 회원들이 많구려. 여운형은 이분들을 해외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예우하고 지지를 호소한 셈인데....”
“<대한독립선언서> 다음 절차는 무엇입니까?” 홍언이 물었다.
안창호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소리 내어 편지 내용을 읽었다. “여운형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동경유학생들에게 전달하여 동참을 호소할 예정이다. 일본에서 청년들이 발표할 독립선언서 작성은 이광수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국내는 종교계 원로들을 만나 해외의 이러한 진행 상황을 알리고 독립선언을 따로 준비한다. <독립선언문>은 최린이나 최남선에게 맡긴다. 동시에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국내로 밀파하여 전국 각처에서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조직한다.”
홍언이 추임새를 넣었다. “해외는 장년층이, 동경은 청년들이, 국내는 종교계 원로들이...! 결국, 전 국민을 망라하는 거사를 계획했군요.”
안창호가 감동하여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김규식에 의하면, 독립만세운동은 만주와 해외를 망라하고, 일본 유학생과 국내 종교계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거국적이며 동시다발적으로 표출될 것을 계획한 것이라 하오. 계획대로 성공한다면 대한독립에 대한 열망과 혁명의 에너지가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이고, 세계가 깜짝 놀랄 것으로 예견했소.”
안창호는 가슴이 뛰었다. “민중 저항운동이라! 참으로 대단하지 않소? 계획이 아주 치밀하오. 거사가 성공한다면 이는 민중혁명의 성공이오.”
홍언은 도산이 응원하고 있는 상해 청년들을 돕는 방법은 미주에서 의연금을 모금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미주에서 김규식 파리파견 비용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동경 선언문까지 입수되면 『신한민보』에 게재하고 모금을 시작하겠습니다.”
“밀정을 잘 따돌려 만세운동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이는 비폭력 ‧ 평화의 힘으로 일제의 폭압 지배를 세계에 알리는 일이 될 것이오. 말 그대로 파리평화회의는 평화의 명분을 챙기는 기회가 될 테고!” 안창호가 꿈을 꾸듯 말했다.
“대신 일본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오겠지요.”
“그렇소. 그것이 제일 걱정이오.”
홍언이 걱정스레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미주도 이승만이 계획하고 있는 파리대표단 파견과 관련해서 의견들이 분분한데요.”
“미주는 이승만과 일치를 해야 하오. 그분이 저토록 파리회의에 가고 싶어 하는데 막을 명분이 없소. 위임통치론 제기만 아니었어도....” 안창호는 내내 이승만의 행보가 걱정되었다.
“위임통치안이 잠시 활용할 명분이 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설득하기는 어렵지요.” 홍언이 말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론 파리평화회의 참가는 상해에 맡기고, 미주는 워싱턴에다 서면으로라도 중앙총회가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보냅시다.” 안창호는 신중하게 말했다.
홍언은 도산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승만에게 앞장설 기회를 줌과 동시에 미주 중앙총회는 상해 청년들이 앞으로 만들어 갈 최고기관을 후원하자는 것이다.’
“그럼 제가 워싱턴에 보낼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해볼까요, 형님?”
“아니오. 그것은 백일규 총회장대리 몫으로 합시다. 그 대신 우리는 독립만세운동 거사에 대비해 포고문과 결의문을 미리 작성하여 준비해 둡시다.”
“형님은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차질없이 일어날 것으로 믿고 있군요.”
“나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믿고 있소.”
기미년 입춘이 지나갔다. 예정대로 1919년 2월 1일, 만주 화룡현 대종교 총본사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고 『신한민보』 에 소식이 들어왔다. 또 2월 8일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들어 왔다.
입춘 일주일 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이대위와 독대하였다. 이대위는 1911년 2월부터 윤병구 후임으로 지금껏 목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대위도 건강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공립협회부터 여기까지 15년을 같이 온 든든한 동지요, 동갑내기 친구였다.
이대위(1878~1928)는 1903년 4월 22일 도미 유학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대위는 안창호와 함께 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조직했다. 이대위는 캘리포니아 UC버클리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1913년 대학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 태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작년 1918년 4월에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다. 안창호가 국내로 파견 가 있는 동안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동포사회를 지켰으며, 신민회의 미주 책임을 선뜻 응해줬다. 그리고 미주 공립협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발전되는 모든 과정에서 사실상의 리더 역할을 했다. 이후 국민회북미총회를 지킨 지킴이이기도 했다. ‘이대위를 만나면 해법이 생긴다.’ 안창호는 중국으로 떠나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고, 이를 이대위와 논의할 생각이었다.
“도산, 기다리고 있었구려.” 이대위가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인사를 건넸다.
“내가 아쉬우니 당연히 다소곳하게 기다려야지. 하하.”
“지난 연말 회의 때 민찬호 동지와는 이야기가 잘 된 것이오?” 이대위가 물었다.
“이승만은 결국 위임통치안을 고집할 생각인 듯하다고 전해줍디다.”
“독단과 아집이라니, 쯧쯧. 분열이 예견되오.”
“분열의 책임은 나에게도 있소. 1917년 7월이던가? 멕시코로 떠나기 전날 박용만이 상해에서 보내온 ‘대동단결선언’에 서명하라는 편지를 받았소. 내가 그것을 즉각 처리하지 않고 서랍에 넣어버린 이유가 나름 있었소만, 그것이 몇 명의 선언으로 될 일은 아니라고 판단됩디다. 기초 준비가 안 된 상태라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소.” 안창호는 신중하게 털어놓았다.
“그때 그 선언을 기초하고 연서한 사람들은 누구랍니까?” 이대위가 물었다.
안창호는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박용만이 상해로 가서 신규식 등 동제사 사람들을 만났던가 봅디다. 신채호, 박은식, 그리고 신석우, 한진교 등이 서명했소. 선언문 기초는 조소앙이 했는데 국민주권론이 언급되어 있었고, 통일된 최고기관을 설치하여 민족대회를 열자는 내용이었소.”
“국민주권 주장과 통일된 최고기관 설치. 그것은 도산과 우리 국민회의 꿈이지. 박용만 총회부회장의 의견이 조소앙에게 전달된 것인가?” 이대위는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서명 지도자들은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를 통일된 대표기관으로 인정한 셈인 거요? 설마 최고기관을 새로 조직하자는 말은 아닐 테고. 대한인국민회 상해지방회를 결성하면 안 되는 일이었을까?”
안창호는 말을 아꼈다. 그때 즉답을 보내지 못하고 멕시코로 떠났던 이유를 이대위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글쎄, 어쨌든 내 생각으로는 조소앙이 주목되는 인물이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디다. 내용의 핵심은 정부 수립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소. 국민주권론 제기는 입헌군주제에서 진보한 것으로 보이긴 하는데, 문제는 대표들의 대동단결선언은 또 다른 계파를 형성할 소지가 있어 보였소. 그래서 침묵했었소.”
“그러니까 도산의 생각은 흥사단 같은 기초 조직을 통해 실업발전이나 인격훈련, 단결훈련 등의 실사구시가 뿌리내려야만 일본에 맞서는 기초 준비가 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시기상조라 판단한 것 아니오?” 이대위가 안창호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했다.
“그렇소. 우리가 흥사단과 북미실업회사를 그래서 시작한 것이지 않소.” 안창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이후로 <대동단결선언>이 <대한독립선언>으로 발전한 것이군.” 이대위가 고개를 까딱했다.
“맞소. 올해 기미년은 청년지도자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소. 동경 <2.8독립선언>이 그 예요. 신한청년당이 따로 상해에서 치밀한 계획을 갖고 전면에서 지휘하고 있다니 장합니다. 조만간 고국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신한청년당 당수는 누구랍니까?”
“여운형이라는 소장파요. 김규식, 서병호, 선우혁, 안정근... 내가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시절부터 알고 있던 청년들이 꽤 있소.” 안창호는 이들을 기억했다.
“여운형이라.” 이대위도 캘리포니아대학을 통해 한국 청년들을 꽤 알고 있었지만 여운형이란 이름은 낯설었다.
“아무래도 내가 중국으로 가야겠소. 상해로 말이오. 가서 일꾼들을 일으켜야겠소. 흥사단 말이오. 그래서 부탁인데...!”
“무슨? 그나저나 상해에서 도산을 그냥 인물 양성하라고 놔두겠습니까?” 이대위는 안창호가 상해로 가면 미주로 복귀하긴 어려울 것으로 예측했다.
“공결을 진행해 주오. 중앙총회 공결을 통해서 나를 중국으로 파견해 주시오. 그리고 같이 갈 청년을 한 명 소개해 주오. 영어에 능통하고 정세를 빨리 이해할 줄 아는 친구면 좋겠소.”
“얼른 생각나는 청년이 한 사람 있긴 한데.” 이대위가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요? 어떤 청년이오?”
“황진남이라고 함흥 출신인데, 1897년생, 22세요. 캘리포니아대 졸업예정자지.”
“오, 그런 인재가 있었단 말이오? 역시 이대위요!” 안창호는 이대위를 신뢰하고 있었다.
“입이 무거운데 언어 습득력이 남다른 친구라오. 영어를 잘하니 번역과 동시통역에 능통하고, 내가 영어 논문을 한글 식자기로 번역하는 작업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오.”
“오, 좋습니다. 한번 만나야겠소.”
안창호는 다소 들떴다. ‘황진남이라...!’ 문득 신민회 때 동행했던 열다섯 나이 정영도의 침착한 얼굴이 떠올랐다.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청년이다.’
안창호는 이대위와 나눈 대화를 곰곰이 되새겼다. 대동단결. 예전에 국내 신민회를 결성할 때는 정말 단시간에 엄청난 단결을 이루었다. 신민회는 공화제에 합의하고 무엇보다도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데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었다.
대동단결. 지도자들 노력의 저변에는 반드시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마치 교회조직처럼 방방곡곡에 흥사단 결사체들이 조직되어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제 막 그것을 시작하고 있는데 상해에서 안창호를 부르고 있었다. 이번에 가는 것은 망명이 아니라 흥사단운동의 근거지를 조국독립 때까지 중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미주 활동 7년은 나름 공고한 기초와 뿌리를 내리는 일이었다. 세계로 뻗은 대한인국민회 조직을 중앙총회로 통합하여 최고통일기관을 만들었고,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이제 총 자본금을 20만 달러에 가깝게 모았으며, 흥사단 설립으로 국민훈련기관의 기초를 놓았다. 자본금 20만 달러는 틀림없이 여타 실업발전의 기초가 될 것이고, 미국으로 유학을 희망하는 가난한 인재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며, 동시에 생활 독립을 지원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이는 흥사단 실무의 기초를 튼튼하게 발전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안창호가 이런 깊은 고뇌에 빠져있는 동안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는 중앙총회와의 협의도 없이 3개 항의 청원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2월 16일 윌슨에게 제출하려 하였으나 정식 제출은 하지 못했다. 민찬호는 대표에서 빠졌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3월 3일, 위임통치안을 윌슨 대통령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했다. 그 내용은 첫째, 열강은 한국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출할 것, 둘째, 열강은 장래 한국의 완전 독립을 보장할 것, 셋째, 한국을 임시로 국제연맹의 관할 하에 둘 것. AP통신이 이를 전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많은 사람이 이승만에게 분노했다. 이승만의 지도력을 놓고 갈등이 예고되었다.
(4장 마침. 5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