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나는 여러분을 섬기러 왔소 #2 (상)
2화. 현순의 두루마리 (상)
2화. 현순의 두루마리 (상)
안창호 일행이 호주를 경유하여 홍콩에 도착한 때는 5월 초. 안창호는 내내 상해 정국이 궁금했다. 누구를 먼저 만날 것인가? 안창호는 신민회 동지 조성환이 떠올랐다. 그러나 며칠 후 홍콩으로 마중 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3.1운동 소식을 미국에 알려준 현순이었다. 현순은 안창호를 보자마자 ‘내무총장’ 책임을 맡으셨다고 인사를 했다.
정인과와 황진남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내무총장? 그럼 임시정부가?”
안창호도 얼떨떨했다. “내가요? 내무총장?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나요?”
“그렇습니다. 도산께서 태평양 바다를 건너오시는 동안 상해에서 그런 결정이 있었습니다. 이거, 축하를 드려야 할지 아니면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큰일을 부탁드립니다.” 현순이 대답했다.
안창호는 당혹스러웠다. 이제껏 바다 위에서 정리해 온 생각들이 마구 뒤엉키는 듯했다. ‘어떻게 하지?’
안창호는 현순과 초면이었다. 현순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간의 일들을 설명했다.
현순(1880~1968)은 서울 옥인동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1903년 하와이이민에 합류하여 기독교회 목사 안수를 받고 1911년에 귀국했다. 상동교회 청년회에서 활동 하던 중 105인 사건 때 검거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후 정동제일교회에서 손정도를 만났다. 1914년, 전덕기 목사가 신민회사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현순이 부목사로 상동교회 자리를 이어받았다.
1919년 2월, 최린이 상해에서 파견된 김철과 함께 현순을 찾아와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을 비롯해 <대한독립선언>과 <2.8 독립선언> 소식을 전했다. 현순과 김철은 2월 19일 이승훈 선생을 찾아가 이 소식을 전했다. 이승훈은 흔쾌히 김철에게 김규식 파리파견 후원금 1만 원을 내주었다. 현순은 이승훈 선생을 모시고 종교계 합동 회의를 진행했다. 기독교계, 천도교계, 불교계 원로들은 거사에 동의하고 긴급 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또한, 독립선언문 기초를 최남선에게 공식 위임했다. 이 회의는 현순을 외교 통신원으로 임명하여 활동비 1천 원을 주고 상해로 먼저 파견했다.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가 완성되자 최창식을 뒤따라 파견하였다. 이들은 금릉대학을 찾아가 서병호, 현창운, 김성근 등을 만나고 다음 날 선우혁, 이광수, 신헌민, 여운형 등을 만나 신한청년당에 가입했다. 현순은 상해임시정부 조직 과정에 참여하면서 국내와 소식을 주고받았다. 국내에서는 3월 1일을 기점으로 <기미 독립선언서> 선포와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시작되었다. 현순은 3월 9일 오전 11시 전보로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중앙총회에도 알렸다.
현순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안창호가 말했다. “현순 동지는 신한청년당에 가입했군요.”
“그렇습니다. 국내 청년들이 상해로 오면 대부분 신한청년당에 흡수되더군요.”
“음... 청년이 모일 수 있는 단체라....” 안창호는 흥사단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순이 말을 이었다. “국내 만세운동은 파리 한국대표단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침 원세훈이 노령지역 대한국민의회가 3월 21일에 행정부 명단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상해로 왔습니다. 노령임시정부인 셈이지요. 대한국민의회는 전노한족중앙총회를 계승하여 1919년 3월 17일에 결성되었답니다.”
안창호는 정재관을 통해 연해주와 북만주 민족진영의 통합 소식을 보고받은 바 있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의회 체제로 정부를 구성한 것일까요? 혹시 노령 정부 조직 명단이 있습니까?”
“여기 명단이 있습니다.” 현순이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뒤적이다 명단을 건네주었다.
안창호는 명단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음, 대통령, 부통령, 국무총리라.... 신민회 동지들 이름이 반갑군요. 상해 사정도 듣고 싶소.”
현순은 그동안의 경위를 상세히 보고했다.
“이광수와 저는 원세훈의 소식을 접하고 3월 25일 상해 남경로 선시공사여관에 방을 정하고 밤샘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이날 12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동녕 선생을 좌장으로 해서 이시영, 이회영, 신헌민, 신성, 신익희,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이광수, 이광 그리고 저도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재외최고기관 설치에는 공감했으나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조성환 등은 정부 조직에 앞서 당 조직 결성이 먼저라고 주장했습니다. 난상토론이 계속되다가 정부 조직으로 방향을 잡고 8인 연구위원을 위촉하여 2차 회의를 약속하고 종료했습니다. 위촉된 8인은 일단 희사금을 모아 프랑스 조계 보창로 309호에 2층 양옥을 빌렸습니다. 장차 최고기관 건물로 사용할 독립 임시사무처를 개설하고 제가 그 총무를 맡았습니다.”
안창호가 현순의 말을 끊었다. “잠깐, 노령지역에서 오신 이동녕 선생이 당 조직을 최고기관으로 들고 나왔다고 했나요? 정부 조직을 하려면 의회 구성이 순서이긴 하지요.”
“네. 당을 먼저 구성해야 한다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조소앙, 조성환, 이광 등도 그렇고. 그분들은 정당조직이 아니면 상해를 떠나겠다면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4월 초가 되었는데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런, 청년들이 애가 많이 탔겠습니다그려! 정당은 대의제, 민주공화제 건국에 필수요건이지요. 서구 근대민주주의가 대부분 정당제에 근거하여 의회정치로 발전하고 있으니, 우리도 조금 이른 감은 있으나 언젠가 적용해야 할 듯합니다.”
“도산께서도 정당조직을 독립 최고기관으로 판단하고 계시군요?” 현순이 물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청년들이 정부 조직을 최고기관으로 원하는 것은 일제의 시시콜콜한 간섭을 거부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기꺼이 피를 흘린 것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정부 조직이 행여 일본의 간섭을 거부하지 못하면 결국, 자치제로 기울지 않을까 걱정되긴 합니다.” 안창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내각이란 의회가 구성하는 것이다. 의회 구성의 조건은 정당조직일터!’
“그렇지요. 저희 독립 임시사무처 입장은 매우 난처했습니다. 그 와중에 3.1운동 검거 열풍을 피해 국내 각처에서 망명해 온 청년들이 상해로 모였습니다. 임시사무처는 4월 10일 공식회의 안내장을 내고 저는 이동녕 선생 숙소를 찾아가 간신히 설득해 회의에 나오시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회의는 밤 10시에 개회되었고, 회의장에는 29인이 모였습니다. 이광수가 회의가 늦어진 경위를 설명하며 아직도 상해에 도착하지 못한 미주 ‧ 북만주 등의 인사들이 있지만, 더는 미룰 수가 없으니 국내 사정을 생각해서 정부를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현순은 두루마리를 펼치듯이 낱낱이 상황을 보고했다. “회의장에는 한위건 등 몇몇 학생들이 목봉을 들고 참가했는데 이들은 ‘정부 조직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아무도 자리를 뜰 수 없을 것’이라며 ‘제발, 만세를 부르며 감옥에 잡혀가고 있는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정부를 조직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오, 저런! 청년들은 상해임시정부를 기대하고 있었군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국내 인사들 대부분이 중국으로 망명했고, 국내는 탄압 정국이라서 상해에서 정부 조직이 발표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4월 10일 밤샘 회의가 진행된 것이고요. 그렇다면 정부 조직을 누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에 관한 절차의 문제가 있었겠지요.”
“맞습니다. 조소앙의 동의안으로 당일 참석한 29명을 초대의원으로 위촉하고 임시의정원을 입법기관으로 공식화했습니다. 이어서 여운형의 동의안으로 무기명 투표로 이동녕 선생을 의장으로, 손정도를 부의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서기로 이광수와 백남칠을 뽑았지요.”
“옳거니! 여러 사람의 지혜가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겠군요. 임시의정원이 정당조직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최고 입법기관 기능을 한 셈이군요. 뽑힌 분들은 최적의 인물들로 판단됩니다. 혹시 초대 의정원 명단은 기억하고 계시오? 29인이라 했던가요? 궁금하오.”
현순은 명단을 내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안창호는 차분하게 명단을 훑어보았다. 명단에는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현순, 손정도, 신채호, 신익희, 이광수, 이광, 조성환, 조동호, 조완구, 여운형, 백남칠, 김철, 선우혁, 조소앙, 한진교, 신석우, 최근우, 김대지, 남형우,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여운홍, 김동삼, 김규식, 현창운 이름이 적혀있었다.
“바로 이들이군요! 매우 중요한 절차들을 치밀하게 잘 진행했습니다. 참으로 큰일들을 하셨소.”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구성 절차를 인정했다.
현순은 안창호의 목소리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현순은 약간 들뜬 목소리로 계속해서 경과를 보고했다.
“4월 10일 회의는 11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대단한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국호를 정하는 문제에 시간을 많이 소요했습니다. ‘대한민국’. 신석우가 제안했지요. 멸망한 대한제국 이미지가 떠오른다며 여운형이 반대하기도 했지만, 제국과 민국은 다르다며 결국 대한민국에 모두 찬성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안창호가 큰 소리로 웃었다.
“여운형도 속내는 정당조직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오. 그러니 신한청년당을 창당했겠지. 하하. 손문도 신해년 중화혁명당을 조직해서 중화민국을 수립하고 원세개를 모셨지만 원세개는 제국 부활에 꿈이 있지 않았소? 그 후로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군.”
“그랬나요...? 참, 그렇군요!”
“내가 알기로 여운형은 공화파요, 혁명파지. 그러니 혁명 정당을 구상하다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지 않았겠소? 제국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왕 망한 제국의 ‘대한’ 명칭보다 ‘신한’을 국가 브랜드로 사용할 생각이 없지 않았던 게요. 하하. 혹시 ‘신한민국’을 대안으로 했던 것은 아니오? 치열했을 토론을 상상하니 정말 기분이 유쾌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한민국, 조선민국 등 다양한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현순은 생각했다. ‘도산은 사람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은 분이다. 그러나 왠지 정감이 간다. 저 유쾌한 목소리, 저 다정한 눈빛에 빠져들면 누구라도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을 끊었구려. 미안하오.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도 아마 대한민국에 표를 던졌을 거요. 아무튼 그렇게 국호를 정하고, 헌법도 제정한 것이군요. 임시헌장 10개 조항 역시 토론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요. 헌장 10개조 내용도 볼 수 있소?”
“물론이죠. 여기, 이 문서입니다.” 현순은 임시헌장 결정 문서도 꺼냈다.
“의정원 서기가 이광수, 백남칠이라 했던가요? 이 글씨는 이광수?”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명필입니다.”
“그렇군요. 과연 명필이오. 그다음에는 각원 선임 절차가 있었겠지요?”
“네. 그전에 최근우의 동의안으로 집정관제를 총리제로 바꾸고 총리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여 6부 총장과 차장을 선임했습니다. 그리고 며칠간 난상토론 끝에 임시의정원법을 통과시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전원위원회와 상임분과위원회 그리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의회 체제를 구축한 셈이지요. 뒤이어 국무원 선출에서 6부 총장과 차장 그리고 각 부처 위원을 구성했습니다. 임시헌장은 새벽녘에 가서야 토론이 시작되었고요.” 현순이 계속해서 회의 결과를 말했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 총장 문창범. 그런데 이때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무슨...?”
“총리를 뽑을 때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가 후보로 거명되자 신채호가 나서서 이승만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추천했습니다. 이때 청년 현창운이 ‘그럼 네가 하라’라는 식으로 신채호를 추천하고 회중이 웃자, 조롱으로 생각한 신채호가 화를 내고 퇴장했습니다. 신채호는 박용만의 전보로 위임통치 청원서 제출 이야기를 듣고 이승만에 분노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당시 형세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승만 지지가 우세했습니다. 아무튼, 진통 끝에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그리고 국무원비서장으로 조소앙을 선임했습니다.”
“신채호의 퇴장이라....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각부 차장에 임명된 사람은 어떤 인물들입니까?” 안창호는 ‘그럴 만했군!’하며 신채호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내무차장 신익희, 외무차장 현순, 법무차장 이광수, 재무차장 선우혁, 군무차장 조성환, 교통차장 선우혁 등을 선임했습니다.”
안창호가 다시 물었다. “상해 정부 조직 발표는 한성으로 전달되었습니까? 한성 반응이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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