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나는 여러분을 섬기러 왔소 #4 (상)
4화. 반가운 얼굴들 (상)
4화. 반가운 얼굴들 (상)
환영식 장소는 교민들이 많이 다니고 있는 영국 조계 북경로의 예배당이었다. 미주에서 도산 안창호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두루 퍼져 예배당은 이미 만원이었다. 안창호 일행이 행사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소개하며 안창호를 반겼다.
안창호는 연설대 앞에 섰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통일되어야 하겠소. 대한국민 전체가 단합하여야 하겠소. 세계가 지금은 우리를 주목하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여기 이 정부를 영광스러운 정부로 만들어야 하겠소.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 도산이다.’ 교민들은 이제 상해임시정부가 제대로 돌아갈 거라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런데 도대체 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최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다는 뜻이겠지.’ 등등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창호는 열흘 후 6월 4일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환영식 연설을 짧게 마쳤다. 안창호는 교민들이 자신을 최고 지도자로 대우하고 있음을 깨닫고 책임의 무게를 느꼈다. ‘이들이 우리가 지켜주어야 하는 국민이다.’
다음 날 오후, 뜻밖에도 이탁이 찾아왔다. 이탁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수줍음을 타며 병실 문을 빼꼼히 열었다. 안창호는 단숨에 이탁을 알아봤다. 이탁은 친구나 다름없는 제자가 아닌가? 이렇게 상해에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오! 자네, 이탁이 아닌가! 어서 들어오게.”
이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일행이 있습니다만, 선생님이 쉬셔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하하, 물론이지. 어서들 들어오게.” 안창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이탁을 맞이하며 물었다. “언제부터 상해에 와 있었소?”
이탁이 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동에서 선생님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왔습니다.”
“허허. 안동이라면 상해에서 꽤 먼데, 그 체구에 한 달음이면 자네 심장 뛰는 소리도 들렸겠구먼! 그렇게 올 필요까지야, 몸을 아껴야지.” 안창호는 긴장하고 있는 일행을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이탁이 일행을 소개하면서 말했다. “저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쭉 있다가 3.1운동 이후에는 안동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꾸리고 있습니다. 여기는 제 동생 이석입니다. 본래 이름은 준용이지요. 석이는 폭탄제조 기술자로 대한독립단의용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기는 김성근, 구국모험단 대장입니다. 어제 선생님 환영식장에 있었답니다.”
“오, 이석 동지. 폭탄제조 기술을 갖고 있군요. 대단하오!” 안창호는 이석을 주시했다. ‘귀한 인재가 탁이 동생이라니! 천군만마를 얻지 않았는가?’
이석(1893~1945)은 이탁의 4년 아래 동생으로, 1910년 이후 형과 함께 신민회 해외 군관학교 기지 답사를 위해 서간도에 따라나섰다가 경술국치로 인해 서간도에 주저앉았다. 이탁 형제는 평남 성천의 부농가정 출신이다. 이석은 1913년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향으로 잠입하였다가 지인의 밀고로 일경에게 붙잡혀 수개월 옥고를 치르고 다시 서간도로 망명했다. 그 후, 형 이탁의 조언으로 봉천에서 중국인에게 폭탄제조기술을 배우고 의용대를 결성하여 폭탄제조 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김성근, 김태연, 이영렬, 황일청 등은 이석을 초청하여 상해에서도 폭탄을 다량 제조하고 기술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석의 의용대와 더불어 구국모험단이 결성된 것이다.
이석은 꾸벅 인사했다. “선생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창호는 이번에는 김성근을 마주 보았다. “김성근 동지라 했나요? 어서 오세요, 반갑구려.”
“제가 불쑥 끼었습니다.” 김성근이 안창호의 허리 굽히는 인사에 당황하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인사했다. ‘참 편안한 분이다. 큰 형님 같다.’ 김성근은 긴장을 풀었다.
“오, 잘들 와 주었소. 그렇지 않아도 내가 궁금한 것이 아주 많다오.” 안창호는 진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무력활동과 상해임시정부 주변 청년들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탁이 얼굴에 웃음기를 걷고 조심스럽게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임시정부가 조직됐는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실망입니다. 간도에서는 3.1운동 이후로 해외 청년들의 무력투쟁 이야기가 많이 오고 갑니다. 모두 한 몸 불사르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안창호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해 청년들은 외교전에 주력하고 있고, 간도 청년들은 항일 혈전을 위해 무장을 강화하고. 외교와 무력준비! 정말 훌륭하오. 두 전략이 조화가 잘 되기만 한다면 독립에 한 걸음 다가갈 기회가 될 것이오. 안 그렇소?”
“외교는 지식과 언어 구사가 필요하지만, 무력투쟁은 자칫 중구난방이 되면 일만 저지르게 될 텐데... 걱정입니다.” 이탁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러니 어른들이 문제로구먼. 총장들이 정부를 꾸려서 지침을 내려야 독립운동이 돌아갈 텐데.” 안창호가 이석과 김성근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탁이 안창호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내무총장이신데.... 아니, 이승만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답니까? 그냥 선생님이 국무총리 대리까지 겸하셔서 전략을 수립하고 명령을 내리시면 좋겠습니다.”
안창호는 ‘이탁의 급한 성격은 여전하구나.’하고 생각했다. “허허, 무슨 명령을 내릴까요? 일단 준비되어있는 청년단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참, 생각났소. 오동진 군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오?”
이탁과 오동진 두 사람은 모두 대성학교 제자였다. 이탁은 부잣집 도련님이고, 오동진은 가족관계가 불우했으나 심성이 고와 가엾은 것을 참지 못했다.
이탁은 신이 나서 오동진의 근황을 알렸다. “말이 없고 묵묵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고, 저와 같이 대한독립청년단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따르는 청년들이 많지요.”
“오, 그렇군. 오동진도 보고 싶소. 앞으로 만나 볼 수 있겠지?”
“사실, 이번에 안동현 여러 곳에 흩어져 각기 활동하고 있는 청년단체들을 통합해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심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석이네 대한독립단의용대까지 통합하면 제법 큰 세력이 됩니다. 무장하려니 자금이 없고 해서 무력활동으로 방향을 잡고 폭탄제조에 나섰습니다. 석이가 폭탄제조 기술자를 양성하고 있지요.”
이탁은 담담하게 이야기했으나, 안창호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이탁의 말을 들었다. ‘아, 큰일들을 하고 있구나! 이들을 어찌 수수방관하리. 전략을 세워 이들의 무력활동을 도와야 한다.’
안창호가 말했다. “자, 하나씩 자세히 말해봅시다. 우선, 안동현 풍순잔 대한청년단연합회부터. 그러니까 탁이 자네가 오동진과 같이 안병찬 선생을 고문으로 모시고 추진하고 있는 단체라는 말이지?
이탁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안병찬 어르신은 오동진과 고향이 같죠. 의주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었는데 105인 사건으로 고생하셨고 3.1운동 때 관전현으로 탈출하셨습니다.”
“뵙고 싶소. 나도 안중근과 이재명 일로 존함을 익히 들었다오. 대한독립청년단은 일단 안심이오. 지금은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구상 중이라고 했나?” 안창호는 안병찬 선생을 임시정부 법률고문관으로 추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그렇습니다. 오동진이 안병찬 어른을 총재로 모시려 하고 있습니다.” 이탁이 말했다.
“음, 좋소. 그럼 다음은 상해 구국모험단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김성근 대장이 책임자인가요?” 안창호가 김성근의 얼굴을 살폈다.
“선생님, 저에게도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불편합니다.” 김성근은 안창호를 스승으로 예우하는 이탁이 부러웠다. 김성근은 여린 감성을 가지고 있는 투사였다.
안창호는 단번에 말투를 바꿨다. “하하. 알겠네. 김성근 동지가 구국모험단의 계획을 말해줄 수 있겠나?”
“아직 공식적인 발대식을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임시정부가 제대로 운영된다면 임시정부를 돕고 싶습니다. 아니라면 우리끼리 3.1정신을 계승해야겠지요.”
“임시정부를 돕고 싶다?” 안창호는 속으로 탄식했다. ‘임시정부 총장님들, 대체 무엇들 하고 계시오...! 할 일들이 이렇게 밀려오는데...!’
김성근은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조선의 독립운동에는 무저항 비폭력 3.1만세운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국 시설 폭파, 요인 암살 등 무력저항운동도 있다. 우리의 독립을 위해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독립선언서에 나와 있듯 육탄혈전도 각오 돼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죠. 청년들은 준비하고 있습니다.”
안창호는 김성근이 마음에 들었다. 선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 이런 청년들은 지력을 갖춘 실천가들이다. 충의용감!’ 안창호가 결연하게 말했다. “우리가 아직 첨단 기술로 무장한 군대는 갖추지 못했어도 육탄혈전은 할 수 있소. 그러나 조급해선 안 되오. 청년들의 목숨만큼 중요한 자본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이오? 우리, 다 같이 치밀하게 더 많이 생각하면서 기회를 봅시다.”
- (하)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