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광수와 여운형 (하)
여운형이 웃음을 거두고 다시 화제로 돌아왔다. “제가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상해 협화서국이라는 곳에 취직했을 때 손문 총통을 접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원세개가 사망한 다음 해입니다. 원세개에게 배신당하고 쫓겼던 손문 총통이 동경에서 돌아와 반제 ‧ 반군벌 중화혁명당을 창당하고, 사회개조를 위해 신문화운동에 주력할 때입니다. 저는 『자림보』 기자였던 진한명이라는 중국 친구 소개로 만났던 것이고요. 그때가 손문 총통이 3민 사상을 체계화할 때였나 봅니다. 애써 중화민국을 수립해 원세개에게 넘겼는데 다시 제왕국가 복원을 시도했으니. 손문 총통도 민중교화의 중요함을 알게 된 것이겠죠.”
안창호가 말했다. “이후 그대는 독립혁명을 꿈꾸며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3강령을 채택한 것이고.”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의 맥을 짚어주는 안창호의 예지력에 감동했다. “피압박 민족의 결사체 같은 것이죠. 윌슨의 강대국 간 민족자결주의에서 얻은 힌트라고 해야 할까요? 약소국 민중을 깨워 독립 국가를 이루고 사회를 개량하여 세계대동으로 나아가자는 것이죠.”
“아주 훌륭하오. 청년 혁명 정당으로 지향점이 명확합니다. 그럼, 임시정부가 통합되면 신한청년당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안창호는 청년 당수의 깊은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한청년당은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유일 혁명 정당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겠지요. 그것이 어렵다면 해산하는 편이 낫습니다.” 여운형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 대단하오. 그대는 당수로서 권력에 미련 없이, 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군요. 손문이 그랬듯이. 그런데 연정에 실패한다면 희생이 너무 크지 않겠소?”
안창호는 문득 미래의 여운형이 어쩌면 자신과 닮은 길을 가게 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여운형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다음을 다시 구상해야지요.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혁한 손문의 전략을 흉내 낼 일은 못 되지만, 저희에게는 도산 선생님이 계시니까. 믿고 있습니다. 도산을 뵈니 왠지 손문 총통을 뵙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안창호는 고개를 저었다. “허허, 말도 안 되오. 손문 총통은 좌우를, 아니 계파를 모두 아우르는 리더십을 가진 분이오. 그분의 3민 사상은 천하위공(天下爲公)에 기초한 사상, 역사의 흐름을 꿰뚫는 민중사상. 그런 거지요? 맞소?”
“도산께서는 민권 사상의 선구자이십니다. 대부분 사회개혁을 권력으로부터 나오는 힘으로 생각하지만, 선생님은 시민의 자발성, 주인 정신에 두고 있지 않으신가요? 민중이 자기 밭을 가꾸지 못하면 사회개량도, 대등한 국제 공조도 어렵죠.” 여운형은 안창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맞소. 그래서 내가 상해로 온 것이라오. 취임하러 온 것은 아니오. 자리가 주어졌다고 냉큼 취임할 수는 없는 여건이오. 인간관계를 조화시키고 조율해야 하는 문제도 있고. 그렇다고 청년들에게 떠넘기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오. 어찌하면 좋겠소? 나도 자네처럼 통일최고기관으로 유일당을 생각하고 있었다오.”
여운형이 깊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서간도와 연해주도 당 조직이 우선이라고들 했습니다. 그러나 이왕에 정부조직을 선포하였으니 잘 되게 해야겠지요. 일은 청년들이 하겠으니 선생님은 방향을 제시하고 명령을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안창호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음, 그대 생각에 입법기관 통합이 가능할 것 같소? 상해 임시의정원과 노령 대한국민의회. 게다가 한성에도 국민대표회가 있으니. 지금은 결국 제각각 행정조직을 선포한 상황이지만.”
여운형이 대답했다. “저는 솔직히 통합 유일당 구성은 당장 어렵겠지만, 각원 통합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안창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 나도 요 며칠 그런 희망을 가져봤소. 상해와 노령은 입법기구 통합에 주력하고 내각은 한성을 존중해서 이승만과 이동휘 통합으로 간다. 상징적으로는 좌우 합작인 셈이지. 어떻소? 이동휘 선생의 한인사회당은 우리나라 최초 공산당계가 아니요?"
"그렇지요.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고 자금 지원도 받게 된다면... 민족운동 진영의 분열이 걱정되긴 합니다." 여운형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우리 외교는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수 없겠지. 김규식의 생각은 어떻소? 혹시 아시오? 파리에서 유럽의 정세를 체험하고 돌아오겠지만" 안창호는 문득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을 생각했다.
"우사 형님은 민족혁명이 우선일 것입니다. 몽골과 연해주 지역 사정을 체험하면서 반일감정과 함께 볼셰비키혁명에 공감대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정세 흐름을 예의 주시하겠지요."
"음, 그렇겠지요. 미국에서 공부했지만 민족 독립을 더 크게 생각할테니...우리같은 식민지 약소국 입장에서는 믿을 것이라곤 대동단결밖에 없소. 양족 외교라..."
“선생님, 좌우 이념 통합, 권력의 균형, 민주제도의 확립,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습니다.” 여운홍이 추임새를 넣었다.
안창호가 여운홍을 보며 미소지었다. “헌데,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계파가 뭐요. 저마다 독점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겠소? 상해 청년들이 우선 계파를 타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성과 노령은 나도 잘 모르겠소. 하하.”
여운형도 신한청년당 내부에서조차 이념 지향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청년들은 아마 이념 갈등으로 어른들과 부딪치게 되겠지요. 하지만 독립 국가의 최고 모델이 제시되면 이념 갈등에서 벗어날 테지요.”
안창호는 여운형이 세계 모범공화국으로서의 독립을 꿈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독립운동의 비전과 같다.’ 안창호가 다시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
“청년 내각 말인데, 작금의 국제간 정세에 대응해서 폭넓은 교류가 필요할 듯한데. 중국의 변화, 레닌 정부의 미래 전략, 계급혁명의 여파와 만주 독립군의 추세, 일본과 미국의 대응.... 내 생각에 일본과 미국의 연대는 결국 깨지고야 말 것이오. 강 대 강은 깨지게 되어있으니. 게다가 유럽 대전으로 일본이 너무 힘을 키운 것 같소. 반드시 미국을 넘볼 것이오.”
여운홍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그럼, 선생님께서 임시정부로 취임하시는 것입니까?”
안창호가 웃음으로 화답했다. “조건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하하하.”
여운형이 상기된 표정으로 안창호의 말을 이었다. “손문도, 레닌도 접견할 수 있으면 해야 합니다. 우리 처지가 그렇습니다. 우선 임시정부를 인정받아야 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약속을 받아내야 합니다.”
여운홍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동지적 결합으로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과연 도산이 취임을 할까?’
안창호가 물었다. “음, 예를 들면 자금 지원 같은 것?”
여운형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재 자금이 부족하고, 자금은 이해관계나 다름없으니 최적화된 전략 수립이 중요하겠지요. 상대는 일본, 막무가내인 일본의 전술들을 우리가 잘 버텨내야 하는데....”
‘모든 일은 자금이다. 자금이 있어야 돌아간다.’ 안창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립운동 자금, 아니 임시정부가 돌아가려면 자금 확보는 시급하오. 어떤 근본적인 대책이 있겠소?”
“.......”
여운형은 말문이 막혔다. 제일 어려운 문제가 자금력이었다.
안창호가 입을 열었다. “음, 내 생각을 진지하게 들어주오.”
두 사람은 안창호의 말에 집중했다. “네.”
“우리가 오랜 침묵을 깨고 간신히 정부를 수립했잖소? 국민회에서 수금하고 있는 애국금이나 이승만 씨가 애국금을 공채금으로 전환해 달라는 요구나 미주는 모두 가능하오. 여러분 결정이 그렇다면 의정원에서 헌장을 개정하면 되오. 하지만 상해임시정부가 아무 준비도 없이 어떻게 정부 운영자금을 만들 수 있겠소? 방법은 세금이오. 세금은 국민의 의무사항. 그런데 해외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소? 다행히 곳곳에 단체들이 산재해 있으니 그 현황을 파악할 수 있겠지요.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무슨 징세냐 하겠지마는, 단체들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잖소. 그러니 인두세를 위한 인구조사는 필수요. 여기도 외교력입니다. 상해임시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게 하는 일. 그러려면 상해 정부는 그들에게 독립의 비전을 제시해줘야 할 것이오. 인구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둔전제 ‧ 노병제 등을 도입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할 수 있겠지요. 일단은 국채발행을 하는 것이 어떻소?”
경청하고 있던 여운형은 안창호를 우러러보았다. ‘이미 정책 비전을 갖고 계시다. 역시, 도산이다.’ “옳습니다. 인구파악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정부조직 이전에 지역 대표자회의 같은 것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소. 그것이 정당조직이면 한발 더 나아간 것이고. 공립협회나 신민회 운동이 통일 연합 최고기관으로 발전하기를 바랐던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임시정부가 그 모습을 갖추고 선포된 마당이니 통합내각부터 서둘러야 하오.”
“네. 그래야하겠지요.” 여운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청년 중에 정부 재정 분야의 적임자가 있소?”
“노령정부는 윤현진을 탁지총장으로 임명했지요. 아마 남형우 선배의 경상도 인맥인 듯합니다. 남형우는 노령에서 산업총장을 맡았습니다. 이종호와 같이 보성전문 출신들이죠. 여기에 이춘숙도 보성법대를 나왔고요. 국내로 말하자면 재력가 출신들입니다.”
“신익희는 어떻소?” 안창호가 묻자 여운홍이 끼어들었다.
“그에 대해선 제가 좀 알고 있는데요, 경기도 광주에서 천재로 이름났지요. 선친은 전직 판서라 합니다. 와세다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보성학교 법과 교수를 지냈고, 1913년에 도미 유학을 시도했다가 자금문제로 포기하고 상해로 왔답니다.”
“그렇습니다. 신익희는 내무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임시의정원 헌장기초위원으로 활동했는데 업무처리에 빈틈이 없이 깔끔합니다. 법 ‧ 제도에 관한 행정부 전문가라 생각됩니다.” 여운형이 대답했다.
“음, 그렇군요. 인재 등용은 지역을 망라해야 합니다. 골고루!” 안창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