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으면 곤란한 선물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역시 생명이 아닐까 한다. 지금 창가에 자리 잡은 다육이(다육식물의 이름이다)에게 물을 주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다육이는 어머니에게 온 선물을 내가 대신 받아 키우고 있는 아이다. 내가 받은 생명이 아님에도 이렇게 신경을 쓰게 만드는데 직접 받은 생명은 오죽할까. 예상치 못한 시점에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이용 가능성도 없는, 장기적으로는 생명을 돌본다는 의미 외에 남는 것이 없는 선물이라고 말하면 너무 비정하려나. 그런데 이렇게 보면 식물이라는 선물, 좋은 선물의 조건에 부합하는 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선물은 선물이고 식물 자체는 제법, 정말로 좋아하는 편이다. 정확히 말하면 식물의 다양한 형태를 좋아한다. 다육 식물은 그런 점에서 아주 좋은 관찰대상이다. 값이 싼데 잎들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관찰의 가성비가 좋다). 색깔, 전체적인 형태, 잎의 형태와 잎이 달리는 방식, 등등... 자세히 보면 정말 가지각색이다. 최근에는 그저 관찰하고 물 주는 것 외에 영양생식을 시도해 보았다. 너무 길어진 줄기에 뿌리가 들릴 것 같은 다육이가 불쌍해 보여 다육이 줄기 중 두 개 정도 윗부분을 꺾어 새 화분에 심어 보았는데 잘 자라고 있다. 말로는 귀찮다 하면서 4년이 넘게 이 다육이를 돌보면서 번식까지 시켜주는 것을 보면 나도 참 대단하다.
어쩔 수 없이 돌보아 주는 다육이였는데 어느새부터인가 돌보는 다육이로 바뀌어 있었다. ’주다‘라는 보조동사가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왠지 이렇게 될 것을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잠시 사랑의 전제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얼빠’라는 신조어를 아시는지. 죽어도 얼굴이 예쁘고 멋있어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뭐 그런 뜻의 신조어인 것 같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스스로가 ‘형빠(형태 빠돌이)’가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대상에게 애정을 품을 수 있는 전제 조건은 일단 그 대상이 어느 정도 아름다운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얼빠나 형빠는 나쁘지 않다. 단지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뛰어넘어야 할 최소한의 문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본다. 옥상의 텃밭에 아버지가 매년 기르는 식물들은 영 내 눈에 차지 않아 그저 돌보아 주는 대상으로 매해 꾸준히 한평생 살다 간다. 한해살이 풀들에게는 잔인하지만, 현실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예외가 없는 편은 아니지만 보통 애정이 생겨날지 아닐지 가늠되는 시간은 첫 대면의 단 5초 정도로 충분하다(사실 5초도 너무 길다). 5초간 얼굴을 마주 보고 시간을 보내면 동물적이랄까, 생물 간에 가질 수 있는 특유의 감이 온다. 식물도 마찬가지여서 다육이는 매우 귀찮지만 언젠가 내가 애정을 쏟는 대상으로 바뀌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었다. 그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4년이나 걸렸지만.
또 하나의 기록이자 이상한 고백을 해 보면, 이 아름답다는 조건은 내 안에서 꽤나 뒤틀려 있어서 남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다. 나는 남자니까 이성을 통해 비유해 보면 남들이 예쁘다고 극찬하는 연예인보다 좀 못생겼을지라도 그 사람이 짓는 특유의 순수하고 덧니가 드러날 수도 있는 미소가 좋다. 대강 이런 느낌의 뒤틀림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드러날 수도 있는 덧니 같은 어떤 것이다. 가능성, 틈새에 가려져 아직 관찰되지 않았지만 섬세한 감으로 포착해 낼 수 있는 본질 비슷한 무언가를 보려고 항상 노력한다. 잘 되지는 않는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가끔씩 ‘미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이어져 사람이 이렇게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기만의 미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점은 썩 나쁘지 않다. 비록 그것이 편견일지라도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바꾸고 싶지도 않고. 또 어떻게 보면 ‘형빠’로서 내가 가진 나만의 미의식은 개인의 기질에 기반을 둔 것이기에 천성을 바꾸려는 무의미한 노력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자신의 의식 안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귀찮음은 감수해야 한다. 눈과 귀를 활짝 열고 키우는 다육이가 메말라 있으면 다가가서 물 주는 정도는 해야 한다.
아무래도 생명을 돌보는 일은 사랑이 필요한 법이다. 식물과 얼굴 한 번 마주 보고 대화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생명을 거두라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역으로 이런 시도도 가능하다. 결혼 전 상대방에게 아무 예고 없이 식물을 보낸다. 6개월 후에 그 식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상대방의 거처에서 그 모습을 확인하고 결혼 상대의 (이것저것을) 감수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생명을 대하는 태도, 인성(관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치 않은 일을 겪었을 때의 꾸준함도 볼 수 있겠지. 다시 보니까 식물이라는 선물도 쓰임 여부에 따라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나에게는 더 이상 안 왔으면 좋겠다. 다육이만으로 이미 충분하다.(제발 식물 선물을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