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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Mar 23. 2023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에 있습니까

소개팅을 나갔다. 평소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밤에 와인 한 잔 걸치면서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장면이 나오는 드라마를 본 기억이 난다. 대사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갑자기 왜 이런 얼렁뚱땅한 이야기를 쓰느냐고 화를 내실 수도 있는데, 사실 저도 저런 장면을 볼 때마다 (굳이 저런 장면과 대사를 넣어야 했을까? 하는 이유에서) 조금 화가 나기 때문에 제 글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므로 평소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는 상대가 재미없어서 화나지 않게끔 하려면 신중하게 답을 해야 한다. 제 취미는 스도쿠 풀기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재미없는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스도쿠가 어때서). 애석하게도 스도쿠 및 수학 문제 풀기는 내 오랜 취미이자 활력소다. 특히 스도쿠는 다들 아시겠지만 1부터 9까지의 수가 빠짐없이, 중복 없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규칙으로 꽤나 긴 시간 동안 재미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여러 퍼즐 중 스도쿠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앞서 말한 행과 열과 작은 정사각형 모두 1부터 9까지 빠짐없이 들어가야 한다는 규칙 자체일 것이다. 예부터 규칙 자체가 특징인 퍼즐들은 장수한다고(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는다고) 하던데 딱 들어맞는 예가 아닐까 싶다. 그런 퍼즐일수록 순수한 논리, 즉 수학적 특징을 강하게 띠지만 아무튼, 진정한 퍼즐에 가깝다는 뜻이다. 진정한 퍼즐을 말하고 있으니 어릴 적 진정한 취미에 대해 몇 가지 조건을 세워본 리스트가 기억이 난다. 리스트의 각 조건에서 모두 합격을 받아야지 진정한 취미가 될 수 있었다. 어릴 적 노트를 열심히 찾아서 가져와 보았는데 심심하면 재미 삼아 체크해 보시길.


1. 노동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완전한 놀이일 것

2. 그만큼 순수할 것

3. 순수하게 완전히 몰두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레 끌릴 것. 즉 자연스러울 것

4. 자기를 표현할 수 있을 것

5. 독립적인, 새로 발견되는 시간과 장소가 있을 것


스도쿠를 취미로 삼지 않았을 때의 리스트라 그런지 논리적으로 완전하거나 통일성이 있지는 않지만 이런 리스트를 세워본 적이 있다. 지금 다시 보니 1부터 3까지는 어느 정도 흐름이 있지만 4와 5는 조금 독립적으로 느껴진다. 스도쿠도 이와 비슷하다. 스도쿠를 한 번이라도 풀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 내용에 공감할 것이다.


이곳에 3이 들어가면 저곳에도 3이 들어가야 맞다. 이런 식으로 흐름을 따라 칸을 채워나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 두 칸에는 3과 4가 들어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나머지 칸과 이 칸은 독립적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런 식으로 풀어나갈 때도 있다. 물론 어떤 칸에 들어갈 수를 가정해서 푼다든지 여러 방법이 있지만 나의 경우 이렇게 푼다. 전자가 수 하나하나를 따라간다는 입장이라면 칸으로 관점을 옮기는 후자의 방식은 몇 개의 칸에 몇 개의 수, 구체적으로는 어떤 수들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고려하는 칸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방식이다. 지동설과 천동설 같은 관계라고 보면 된다.


물론 어려운 스도쿠일수록 이 칸에는 1이 들어가야 해, 와 같은 칸과 수의 관계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풀 때 애를 먹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함수적 사고니 뭐니 운운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맞아떨어진다는 것. 수에 맞는 칸, 칸에 맞는 수를 찾아나가는 시간이 좋은 것이다. 1부터 9까지 모든 수가 제자리를 찾아간다. 9개의 자리와 9종류의 수와 9개의 똑같은 수들.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을 수 있게끔 최대한 많은 사실과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풀고 있다. 여기서 사실이란 이 두 칸에는 3과 4가 들어간다, 와 같은 1:1로 이루어지는 관계들이고 가능성이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관계들이다. 간단히 말해 머릿속에서 여러 칸과 여러 수를 다루면서 스도쿠를 풀어나가고 있다,라고 보면 된다. 이미 확정된 사실을 토대로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을 꿈꾸듯 보며 퍼즐이 가진 유일한 답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라고 쓰면 조금은 낭만적으로 느껴질까요. 경험해보고 싶으신 분들은 조금 머리가 아플 수도 있지만 시도해 보시길.


뜬금없지만 여러분의 취미가 궁금해집니다. 취미로서 글 읽기를 생각할 때 제 글은 읽는 입장에서 1부터 5까지의 조건을 충족시키는지도 궁금해지네요.


평소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요즘은 일 중간중간에 퍼즐을 푸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퍼즐이요? 글쎄요. 전공이 수학이라 평소에는 주로 다양한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요즘은 스도쿠에 푹 빠져있네요. 에이 장난치지 마세요. 수학 문제 풀기가 어떻게 취미가 될 수 있어요.


장난이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길게 글을 쓴 것일지도. 그날의 소개팅은 잘 안 되었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앞서 이야기한 취미 조건 리스트(이것 또한 나에게는 있어야 할 것들이긴 했다)보다 역시 있어야 할 말들을 잘 찾아서 신중하게 말했어야 했다. 여성 분은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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