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공간들 : 고속터미널 일대 (1)

고투몰을 아십니까

by 도시관측소
빠르게 바뀌는 도시가 끝내 지워버리지 못한 곳일까? 아니 그보다는 지우지 않고 오히려 확장시켜야만 할 어떤 생활 가치의 층이 있는 셈이다.



서울 강남에서 도시학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곳을 딱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고속터미널 일대다. (주의 :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임)


오늘은 그 첫 번째 기록, 일명 '고투몰'이라 불리는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다. 태동부터 국내 최장 지하상가로 알려져 왔는데 그 사이 도시는 성장했고 이곳은 더 길어졌다.


단순 길이의 확장이 아니다. 주변 지역에 대한 엄청난 자본 투자가 강제적 연장이라는 총알을 넣었다면, 피스톤을 당긴 건 개별 점주와 운영 주체의 눈물 나는 노력이다. 그 결과가 상권 흡입력의 자체 강화로 나타났다.


서쪽으로는 래미안 원베일리 상가를 지나 공공보행통로를 통해 한강공원과 잠수교까지 지하에서 직접 연결된다. 남쪽으로는 신세계와 터미널 대합실, 호텔까지 (그 규모야 말해 뭐 해). 동쪽으로는 반포역 지하상가까지.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거대한 지하 도시다.


1.jpg 고속터미널 지하상가(고투몰)에 가면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제품을 마주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냥 지나치기 힘들 정도다.


서울기록원에 따르면 이 지하상가의 준공일은 1980년 6월 20일이다. 46년 전 처음 생겼을 때도, 35년 전 내가 어렸을 적 어머니 지점토 수업을 따라다니던 때도, 그리고 지금도 - 이곳은 한결같이 북적인다. 수많은 지하상가가 텅텅 비어갔지만 고투몰의 인파는 유지되거나 오히려 늘어났다. 매장의 경쟁력이 탁월해서라기보다 일단 잡화류의 방대한 메뉴와 저렴한 가격이 한몫했다.


흥미로운 건 변한 것보다 안 변한 것 - 패션, 주얼리, 잡화, 그리고 약간의 분식이라는 업종 구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늘 파격 세일 중이다. 가게가 문을 닫든, 재고를 처리하든, 혹은 급전이 필요해서든 여러 이유에서다.


2.jpg 수입생활용품 할인매장. 벨기에 초콜릿(원래 판매가격 1만 2천 원)이 일부 녹아서 단돈 2천 원에 파격 세일 중이다.


대기업이나 프랜차이즈의 침투는 (거의) 없다. 매장의 크기 또한 눈에 띄게 바뀐 흔적이 없다. 간혹 두 매장 사이의 벽을 터 한 매장처럼 쓰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넋 놓고 5분 정도 바라본 매장이 하나 있는데, 이디야 커피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매장에서 파는 건 주인 마음대로... 흑당버블티, 헤이즐넛 티라미수, 26가지 토핑을 고를 수 있는 요거트 아이스크림까지.


수선집도 있는데 전면 판매공간을 옆집 옷가게에게 내준다. 나름의 상부상조 (물론 수수료를 받겠지?) 나아가 요즘 거의 사라진 수입과자 매장과 수입생활용품 도매 상가도 있다.


분수대 근처나 분식집 앞 의자에는 지금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사람을 두리번거리거나 방금 산 기모바지를 벗었다 입었다 하며 사이즈와 “득템”을 확인한다.


3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전 세계에서 상권의 흥망성쇠가 가장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도시 중 하나가 서울이다. 그 한가운데서 반세기를 버틴 이곳의 저력은 솔직히 놀랍다.


빠르게 바뀌는 도시가 끝내 지워버리지 못한 곳일까? 아니 그보다는 지우지 않고 오히려 확장시켜야만 할 어떤 생활 가치의 층이 있는 셈이다. 고투몰은 그 층이 아직도 진행형으로 작동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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