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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형 성장 (2)

도시의 번영은 인구수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by 도시관측소 Feb 18. 2025

Written by 김세훈


한 도시의 번영은 단순히 인구수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인구보다 더 중요한 게 혁신의 밀도와 연결의 파급력입니다.



한때 쇠락의 길을 걷던 지역이 세계적 바이오테크 허브로 탈바꿈했습니다. 보스턴과 캠브리지가 그렇습니다. 이 지역은 인구 감소율이 30%에 달했던 암울한 시기를 지나, 지금은 전 세계 생명과학 혁신의 중심지로 우뚝 섰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극적인 반전을 가능케 했을까요? 


앞의 글에서 기업 이야기를 했다면 이제 실험실, 즉 공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바이오·헬스 및 백신 개발 기업들은 신약 개발이나 백신 후보물질 연구, 세포 배양, 유전자 분석, 질병 모델링 등의 과학 실험을 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 공간은 고도의 청정 환경과 첨단 장비가 요구됩니다. 그래야 미세한 생물학적 반응을 측정하고 분석할 수 있죠. 또한 효능을 평가하기 위한 임상 시험 데이터를 생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품의 품질 관리가 가능하고 규제 당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죠. 그래서 공간의 조성과 이용에 엄청난 비용이 투입됩니다. 집구석 차고에서 컴퓨터 한 대로 창업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매우 다릅니다. 


보스턴과 캠브리지에서 바이오·헬스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실험실 공간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습니다. 이에 따라 2024년 기준 보스턴과 캠브리지에는 약 158만㎡(48만 평) 면적의 실험실이 새롭게 조성되고 있죠. 이는 토지 면적이 아닌, 개발이 예정된 실험실 면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엄청난 규모입니다. 그중 상당수는 빈 땅에서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빈 오피스 등 유휴 공간을 실험실로 변신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보스턴 지역에만 실험실로의 용도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거나 예상되는 건물이 38채나 됩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예정된 건물의 수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숫자입니다. 공간을 고쳐 다시 쓰는 것은 새로 짓는 것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폐기물 발생도 줄어듭니다. 공간 공급의 시점도 훨씬 단축할 수 있죠. 신규로 조성할 예정인 48만 평의 실험실 중 9만 평 정도가 기존 오피스의 실험실 전환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늘어나는 공간에 대해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실험실 공급이 누군가에게 비싸게 팔리기를 기대해 미리 만드는 투기성 개발이 아니라, 부가가치 창출을 목표로 하는 실수요 기업과 연구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과공급에 따른 미분양 이슈가 심각한 지식산업센터나 신도시 상가와는 사뭇 다릅니다. 뚜렷한 이용 수요가 있는 경우 공간이 모자라면 즉시 더 지어야 하고, 지을 땅이 없으면 기존 공간을 바꿔서라도 공급하는 게 맞습니다. 이런 전략적 결정은 그 도시의 위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한 도시의 번영은 단순히 인구수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인구보다 더 중요한 게 혁신의 밀도와 연결의 파급력입니다. 도시에 가치가 창출되는 FADE 모델, 즉 y = f(l, k, i) ✕ ADE에서, 도시의 인구 감소는 분명 노동(l)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능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불합리한 규제를 개선하며, 금융자본과 실험실 공급, 스타트업 지원 등 소프트인프라를 잘 조합하면 A(생산성), D(다양성), E(기업가정신)가 함께 향상됩니다. 이를 통해 한동안 인구가 줄어들던 도시도 얼마든지 번영할 수 있습니다. 보스턴과 캠브리지가 그랬죠. 설사 이들 도시에서 인구가 늘어나지 않아도 공간 공급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보스턴과 캠브리지의 인구는 안정세로 돌아섰으며, 같은 기간 기업의 수는 5%, 일자리는 20%, 평균 연봉은 50%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한때 인구의 30%가 줄어들었던 도시가 이룬 극적인 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대규모 국공유지의 확보, 유전자 재조합 기술 관련 규제 혁신, 글로벌 기업과 연구소의 유치, 하버드와 MIT 등 교육기관의 노력과 교수·연구자의 창업, 대학 병원과의 기술 협력과 데이터 공유 등.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진 결과죠. 여러 백신사의 설립과 비영리 기관의 참여로 스타트업 생태계가 살아났고, 코로나19 기간에는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투자가 있었습니다. 최근 매사추세츠주 생명과학법 통과까지, 수십 년에 걸친 올바른 결정이 하나둘 쌓여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인구수 늘리기는 한 도시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인구 감소를 막는 데만 초점을 두고 자원을 움직이면 보스턴형 성장은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지역에서 가장 창조적인 기업과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고 함께 부를 창출하는 여건 마련이 최우선입니다. 여기에 인재 배출, 근로자 재교육, 가족의 행복한 정착과 지역 사회를 위한 일자리 공유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아가 창출된 부와 혁신의 성과는 기여도에 따라 잘 분배되어야 합니다. 성과에 기여하지 않고 숟가락만 얹으려는 사람들을 촘촘하게 골라내야 합니다. 


인구 증감은 사실 지역 발전의 후행 지표입니다. 마치 몸에 나는 열이 병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것처럼요. 이런 선후 관계를 잘못 파악하면 공공 투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맙니다. 나아가 도시 발전에 있어 지역 리더십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일에만 매달리고, 이해관계자들이 자원을 고루 나눠 갖는 분배의 악습에 함몰되면 정작 큰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때로는 현실을 뛰어넘는 몽상가처럼 보일지라도 도시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조직화가 필요합니다.


코로나19 같은 위기는 역설적으로 준비된 도시가 스스로의 진가를 발휘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주저앉을 때, 준비된 도시들은 오히려 앞서나갈 수 있었죠. 시시한 목표나 불필요한 제약은 과감히 정리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올림픽을 위해 도시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올림픽을 우리 도시에 맞추겠습니다.”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준비위원 재닛 에번스의 말입니다. 미래는 불확실성의 덩어리입니다. 4년 후 개최될 올림픽을 지금 준비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불확실한 미래에 확실한 현재를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현 도시의 여건에 따라 우리만의 올림픽을 세상에 선보일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죠. 핵심은 “우리만의 올림픽”을 정의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도시의 성공은 올바른 결정과 행동이 레고 블록처럼 하나하나 쌓이면서 이뤄집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갑자기 성공한 도시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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