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체코 프라하로 넘어가기 위해 베를린 중앙역으로 향했다. 베를린 중앙역은 뮌헨이나 쾰른, 프랑크푸르트에서 봤던 독일 대도시의 그 어떤 중앙역보다도 컸다. 2006년 FIFA 월드컵에 맞춰서 개업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체코 프라하까지는 EC열차로 약 4시간이 걸린다. EC열차의 특징 중 하나는 일부 객석이 룸 형태로 되어있다. 총 6명의 좌석이 한 룸 안에 배치되어있는데 3명씩 마주 보고 있어 같은 룸 안의 승객들과 대화를 안 할 수가 없게 된다. 유럽 열차는 대부분 예약 없이 앉는 입석이나 룸 안에 다른 좌석이 예약이 안 돼있거나 아무도 없을 경우 그 룸을 개인이 혼자 쓰게 된다. 나는 EC열차의 룸 안에 창가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베를린행 9시간 열차에 비하면 4시간은 껌이지.". 설레는 마음을 앉고 동유럽의 대표 도시 프라하로 출발했다.
중세의 도시 체코 프라하
체코는 우리에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체코슬로바키아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두 민족이 합쳐 만든 공화국으로 1993년 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갈라졌다. 갈라졌다고 해서 두 나라가 비평화적으로 갈라 진건 아니다. 한때 한국에 보헤미안이라는 단어가 많이 돌았었다. 세계적인 영화인 보헤미안 랩소디로 시작해서 흔히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 일명 YOLO족들을 한국에선 보헤미안 스타일이라 부른다. 바로 그 보헤미안이 체코인을 뜻한다. 아주 오래전 체코에 떠돌던 유랑민족들을 일컫는 말이 보헤미안이다. 아직까지도 독일은 체코를 보헤미안 지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보헤미안이라는 단어가 체코인들에게 모욕을 주는 단어는 아니다. 독일인들 중 독일 바이에른 지역을 아직까지 바바리안 지역이라고 하는 거와 같다고 보면 된다. 명확한 근거는 없다고 하지만 바이에른의 어원은 로마가 게르만족의 일부 민족을 일컫던 바바리안에서 나왔다고 한다.
천년의 중세도시
아스팔트 대신 보도블록이 깔아져 있다
프라하는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서유럽의 도시랑은 다른 분위기였다. 도시 전체는 중세시대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운행되는 지하철이며, 버스들은 모두 다 현대식이었다. 우선 서유럽에서 느껴지는 느긋함이 없었다. 다들 불편하더라도 느림을 강조하는 서유럽과 달리 오히려 아시아 국가들처럼 빨리빨리가 좀 더 내재되어 있는 거 같았다. 지하철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도 굉장히 빨랐고 우선 가게들, 백화점이 모두 오후 10시까지, 어떤 곳은 자정까지 오픈이라고 한다. 이런 것만 보면 굉장히 현대적인 도시 같지만 건물이며, 도로는 중세시대 사용하던 그 특유의 느낌 그대로였다. 특히 도로는 대부분 아스팔트가 아닌 울퉁불퉁한 옛날 보도블록이었는데 덕분에 호텔까지 가는 동안 내 캐리어 바퀴가 박살 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이 도시, 확실히 지금껏 봐왔던 유럽 도시랑은 다르다.
독일 맥주 vs 체코 맥주
호텔 수제 맥주, 이제껏 먹은 유럽 맥주 중에 최고였다
프라하 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호텔로 달려갔다. 프라하에서 약 3일간 머문 호텔은 유럽에서 다녔던 호텔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호텔이다. 방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와 넓은 방, 그리고 맨 위 천장에 뚫린 별 관측용 창문까지 정말 완벽했다. 더욱 완벽했던 건 바로 호텔에서 판매하는 수제 맥주! 맥주의 나라라고 하면 다들 어디를 생각하는가? 아마 대부분 독일과 체코를 뽑을 것이다. 굳이 두 나라의 맥주 순위를 뽑으라면 난 당연컨데 체코를 뽑을 것이다. 비록 내가 독일어를 전공을 하고 있고 독일 교환학생 자격으로 왔지만 체코의 맥주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게다가 가격도 싸다. 체코 맥주의 대표적인 맥주로는 코젤(Kozel)이 있다. 요 근래 한국 맥주집에서 유행하는 시나몬 가루를 뿌린 코젤 다크의 그 코젤이 맞다.
전형적인 체코 음식
호텔에서 빠져나와 본격 프라하 여행을 시작하기 전 우선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호텔 데스크에 체코식 음식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옆에 위치한 식당을 알려줬다. 들어가자마자 종업원에게 체코식 음식과 맥주 중 가장 잘 나가는 것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샤슬락과 식당 수제 맥주를 추천해줬다. 아 대낮부터 체코 맥주라니 벌써 두근두근 거린다. 가격은 둘이 합쳐서 한화로 약 8천 원 정도 나왔다. 일반 서유럽이었으면 2만 원 정도는 나왔을 텐데. 정말 물가가 싼 게 맞나 보다. 체코 정말 너무 마음에 든다. 맥주 맛을 표 헌 하자면 독일 맥주보다 좀 더 곡물 맛이 강했다. 시원한 탄산과 고소한 향, 정말 세상에서 완벽한 맥주다.
카프카를 느끼러 가다
카프카의 집으로 가는 길
대낮부터 맥주를 한잔 걸치고 바로 프라하 투어를 시작했다. 첫 번째 장소는 바로 프란츠 카프카 생가! 카프카 생가는 내가 독일에 오기 전부터 꼭 한번 오고 싶었던 곳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 출신의 독일 실존주의 작가 중 대표인물이다. 평생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묻고 살아온 작가이며 대표작으로 [변신], [소송],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내가 프란츠 카프카를 처음 알게 된 건 대학교 독일어 세미나 시간이었다. 당시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읽고 토론을 해야 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카프카 하우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들은 대부분 어둡다. 처음 읽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혼동을 가지기 쉽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특히 나같이 평생 이과를 전공하는 사람이 독일어 문학을 처음 접하게 되면 이게 당최 무슨 소리인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대부분 "독일 작품들은 읽다 보면 정신분열이 올꺼같아!"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카프카의 작품들이 이 말을 나오게 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변신]의 내용만 봐도 범상치 않다.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가던 성실한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바퀴벌레로 변하게 된다. 바퀴벌레로 변하게 되면서 느껴지는 몸의 불편함들, 가족들의 시선과 외면, 한 마리 힘없는 벌레가 되어버린 무기력함이 책 속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책의 엔딩은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카프카의 특유한 어둠, 막막함과 찝찝함, 무기력함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마무리된다. 아마 그래서 독일 작품들을 읽다 보면 정신분열이 올꺼같다는 말이 나온 거 같다.
불운했던 카프카의 삶
대표 작품 [변신], 책 표지마저도 어둡다
카프카의 작품들이 모두 어두운 이유는 아마 그의 성장배경 때문일 거다. 프란츠 카프카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던 프라하에서 유대인 자녀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며 성장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인도, 헝가리인도, 체코인도, 독일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니였다. 유대인들은 그를 시온주의에 반대한다며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아마 어릴 적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맞았을 거다. 게다가 그의 유대인 부모님은 당시 카프카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격한 부모님이었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굉장히 독단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들 프란츠 카프카를 헛소리나 해대는 몽상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카프카는 자신의 감정과 감성을 접어둔 채 독단적인 아버지 밑에서 바르고 정직한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다 결핵에 걸려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 맞서기보다 자신의 작품으로 독단적인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표현했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가 대표적이며 [변신]에 나오는 가족들의 태도도 이를 나타낸다.
카프카는 어릴 적부터 불운한 생애를 보냈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카프카는 그의 형제관계에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정서에 도움을 줄 가족을 찾지 못했을 거다. 카프카는 아주 어릴 때 두 동생이 태어났지만 곧 죽게 된다. 그리고 또 3명의 여동생이 태어났지만 이 여동생들 또한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죽게 된다.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한 동생들을 보며 카프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끝없는 무기력함과 답답함을 느꼈을 거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나있다. 그리고 이게 그가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평생 종교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던 이유일 수도 있다. 평생 종교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내려진 가혹한 형벌, 나치 수용소 학살. 카프카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 상황에 쳐해 있으면 신은 없다는 끝없는 무기력함을 느낄 것이다.
수기로 쓰인 그의 작품과 편지들
카프카의 생가 안에 들어가면 그가 수기로쓴 작품 초안들을 볼 수 있다. 그의 아이덴티티가 무기력함이기 때문인가 생가 안에 조명도 대체적으로 어둡다. 바로 여기에 그의 모든 생각들이 모여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경건해졌다. 카프카는 평생을 불운하게 살았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에게 버림받은, 체코인, 독일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인 모두에게도 속하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진채... 생전에 그는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기를 꺼려했다. 자신의 고독함과 생각을 다른 이들은 알아주지 않을 거라는 이유였을 거다. 그는 평생 고독 속에서 살다가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허약해져 결핵에 걸려 결국 사망하고 만다. 가족들만이라도 그를 이해해줬다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텐데... 물론 그랬다면 그의 작품들은 이렇게 문학성이 높지 않았을 거지만 그래도 한 사람으로서 이런 고독한 인생을 살다 갔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먹먹했다.
카프카, 당신의 생각을 좇아 왔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 또한 자신의 모든 생각과 작품들을 불태워 달라는 거였다. 카프카는 평생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있었는데 죽음이 다가오자 그에게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카프카의 문학성을 알아본 브로트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세상에 내놓았지만...브로트 그가 아니였다면 우린 영원히 카프카의 문학을 만나보지 못했을거다.
평생 불운했던 카프카를 기리며
"당신의 생각을 좇아 동방의 먼 나라에서 왔어요.". 카프카 생가의 방명록에 적어놓고 나왔다. 그가 알아볼 수 있게 독일어로 그리고 내가 당신의 생각을 좆아 머나먼 동방에서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한국어로. 지금이라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여기찾아오고 있다고 그를 꼭 위로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