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섯 돌아보기 02.
집 생각이 나서, 오래된 친정집 도면을 꺼냈다. 1991년 신축이니 정확히 30년이 된 집이다. 철근 콘크리트 벽식 구조에 외벽 마감은 조적조 붉은 벽돌, 지붕은 아스팔트 슁글을 올린 집. 사실 나는 대학에서 건축사를 강의하는데, 여기에 ‘양식’을 논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냥 양옥이고, 1980~90년대에 많이 지었던 형태의 단독주택이다. 1970~80년대 유행했던 ‘불란서 주택’도 아니지만 같은 시기 유행했던 건축가의 ‘작품주택’도 아니다. 집장사의 판에 박힌 방 나누기와 저명한 건축가의 디자인 중간 정도에 놓인, 그냥 ‘마당 넓은 집’이다.
스물한 살. 내가 건축으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했을 때 어쩐 일인지 어머니는 이 도면 꾸러미부터 챙겨주셨다. 당신 생각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축'이 우리 집이었던 게다. 공사가 다 끝난 뒤에는 그저 문갑 한구석에 보관했던 것이었지만, 이게 막내한테는 쓸모 있겠다 싶으셨던 모양이다. 시간이 나면 우리 집을 모형으로 만들어 부모님께 선물하겠다던 학부 때의 계획은 '이번 학기만 끝나면'만을 반복하다가 세월에 묻혀 버렸다.
이 도면들은 자그마치 그 옛날, 손으로 그리고 청사진을 구워 착착 접어 만든 허가철이다. 청사진의 아릿한 냄새와 묵은 먼지 냄새가 섞여 묘한 향수를 일으킨다. 한겹한겹 펴가며 읽노라면 마치 빳빳하게 개어놓은 한복 저고리를 펼쳐보는 것 같다. 지금은 캐드로 몇 장이고 뽑을 수 있는 게 건축도면이라지만, 도면 자체로 멋있다는 점이 손으로 그린 선의 매력이다. 캐드도면의 칼 같이 오차없는 선도 청사진으로 각인한 멋짐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도 아마 이게 친정집 도면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뭉클한 감정은 생기지 않았으리라.
평면은 특이할 것이 없다.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빙 둘러 배치된 형태로, 아파트 평면을 단독 주택에 옮겼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 크게 고민하지 않은 평면이다. 다만, 안방과 부엌이 상당히 크다는 점이 가장 한눈에 드러난다. 안방은 한 변이 5미터가 넘어서, 열두 자짜리 장롱이 들어가고도 한참이 남았다. 이 집으로 이사하던 날 이사짐 아저씨가 "햐아~ 여기서 축구해도 되겠심더~"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가하면 부엌은 안방보다 작았지만 거실보다 컸다. 이 역시 일반적인 평면 구성은 아니다. 근현대 한국 주택은 거실이 중앙에 가장 큰 면적으로 들어가는 이른바 ‘거실 중심형 평면’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보조주방으로 쓰는 베란다도 부엌 옆에 붙어 있으니, 웬만한 시골집 너른 부엌이 부럽지 않았다.
이제 모두 출가한 우리 삼남매는 이 집을 '두류동 집'이라고 부른다. '두류동 집'의 안방과 부엌이 제일 큰 면적을 차지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제사와 명절을 포함하여 일 년에 여덟 번 손님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기제사에 보통 4~50명, 명절에는 12촌 친척까지 인사 오는 집이다 보니, 제사를 모시려면 안방이 커야 했다. 한번에 다 들어갈 수도 없어서, 방 밖으로 밀려 나온 어린애들은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절을 했다. 내가 서울에 올라오고 세월이 꽤 지났을 때 ‘안방에서 모시던 제사를 이제 거실에서 하게 되었다’며 어머니가 대단한 소식인 듯 전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안방의 의미가 컸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 ‘두류동 집’의 안방은 덩그러니 크기만 남았다. 이제는 제관도 많이 줄어서 예전처럼 명절에 친척이 많이 모이지도 않는다. 묵은 가구로 다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에는, 가져가지도 않을 것이면서 버리지도 못하게 하는 자식들 물건만 남았다. 은퇴하신 아버지는 안방에,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신 어머니는 언니가 쓰던 방에 각자의 책상을 놓으셨다. 아버지는 커다란 안방 책상에 앉아 하루종일 사경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신다. 그 모습이 꼭 어느 노배우의 독백무대 같다고 느낀 적이 있다. 적다가 좋은 글귀는 꼭 내게 카톡으로 보내시는데, 어떤 날은 네다섯 개가 넘기도 한다. 알뜰살뜰한 멘트 없이 덜렁 사진만 카톡, 카톡 울려댄다. 이걸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과 지금 당신의 무료한 시간이 너무나 짐작되기에, 나는 서로 간에 굳이 대답을 고민하지 않아도 될 이모티콘을 찾아 대답한다. 적당히, 서운하시지 않게.
자식들이 모두 떠나버린 집은 마치 껍데기 같다. 연로하신 두 분께 이 큰 집은 되려 짐일지도 모른다. 언제 들릴지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두 분의 빈 시간을 쓸고 닦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도 자식 중 누구 하나 이사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는 건, 이 집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은 고향이기 때문이다. 오늘 문득 꺼내 본 친정집 도면에는 누구의 엄마도 며느리도 아닌 오롯이 우리 부모님의 딸, 그냥 철없는 막내로 살았던 내 모습이 들어 있었다. ‘자식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라는 비겁한 변명으로, 조금만 더 고향으로 머물러 주길 바라며 낡은 도면을 다시 접어 책장에 꽂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