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저녁 6시가 되어 버린다. 겨울이지만 그나마 서쪽 동네라 서울보다 조금 해가 늦게 지는 것 같다. 차에 내린 나는 급한 마음으로 뛰어 올라갔다. “우리는 천천히 올라가고 엄마 사진 찍으시라고 해”라고 하며 아이를 챙기는 남편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매표소에 돈을 내고 가파른 포장도로를 거의 뛰다시피 올라가니 ‘삼랑성 남문(三郎城 南門)’이 나온다. 일주문 대신 이 길을 지나는 셈이다. 급하게 합장하고 반배를 했다.
강화도 전등사(傳燈寺). 남문에서 연결되는 진입로는 대조루(對潮樓)의 누각와 그 옆의 종루(鍾樓)로 나뉘는데, 진입로에서 비교적 직선 축의 정점에 종루가 있고 양 갈래의 오른쪽으로 대조루 아래를 통과하는 길이 보인다. 한국의 건축가들이 너도나도 ‘좋아한다’ 외치는 그 유명한 ‘누하진입’이다. 누하진입(樓下進入). 정작 건축 역사 공부에는 소홀하면서 사찰이니, 미학이니 따지는 이들의 행보를 싫어하는 나로선 될 수 있으면 가려 쓰려는 용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각 아래를 지나 들어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니, 굳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길을 들어서려 할 무렵,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법고와 타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두고 서른세 번 종소리를 모두 듣고 싶었지만, 해가 지기 전에 건물을 둘러봐야 한다는 마음이 급하다.
‘전등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보물 제178호이다. 광해군 때 다시 지었다고는 하나 17세기 초의 건물치고는 공포의 투박함이 멋있었다. 공포(栱包)는 전통건축물의 상부 지붕 구조를 받치는 구조부재이다. 궁궐이나 사찰의 지붕 아래 오밀조밀 조합되어 있는 조각 같은 부재들을 말한다. 쉽게는 그리스 건축의 도릭, 이오닉과 같은 주두 양식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기둥 머리를 장식하는 것과 목조 건축의 구조적 기능까지 담당하는 공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과서상으로는 주심포, 다포, 익공으로 나뉘며,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주심포가 가장 오래 되었다. 주심포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것, 다포는 기둥 사이에도 놓이는 것을 말한다. 익공은 공포의 조각 모양이 새 날개처럼 뾰족하다고 해서 불리기 시작한 이름으로 간주하며, 조선시대 건축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국 전통건축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꼽는다. 물론 고려 중기인가 후기, 말기의 건축물인가는 아직 논란이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포(包)가 놓이는 다포와는 달리 기둥 머리 위에만 놓이는 주심포 양식은 오래된 건물일수록 부재의 크기가 크다. 앞서 ‘투박하다’라고 말했지만, 그만큼 과감하고 멋있다는 내 나름의 표현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건축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물론 그 비범한 가람 배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심포의 압도감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사찰 건물은 대부분 지붕 구조를 과장해서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가분수에 가깝다. 현대 건축에서 흔히 황금비를 운운하는 방식을 따른다면 ‘비례가 맞지 않는다’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렇듯 사찰 지붕이 강조되어 지어지는 것은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속세의 미학과 전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고보니 법당 안으로 보이는 수미단과 닫집도 여간 예사롭지 않다. 은해사 백흥암의 수미단과 논산 쌍계사 닫집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정면3칸, 측면 3칸의 크지 않은 공간 안에는 고찰의 비범함이 묻어났다.
대웅보전의 단청은 빛이 바래 거의 백골집에 가깝다. 솔직히 나는 이러한 빛바램이 더 좋다. 시대 차에 따른 단청 보수의 흔적 때문에 군데군데 진한 선긋기가 보이기도 한다. 전통건축에서 단청(丹靑)은 단순히 장식 때문만이 아니라 벌레와 습기로부터 목조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다. 언젠가 새로 덧칠되겠지만 낡은 시간의 매력까지는 살려내지 못하리라. 단청 보수가 시작되기 전 밝은 날에 꼭 다시 와 제대로 사진에 담겠다고 다짐했다.
전체를 보았으니 이제는 지붕 아래 ‘나부상’을 확인할 차례이다. ‘나부상’은 전등사 대웅보전을 찾는 이들에게 가장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으로, 지붕의 네 군데를 떠받치고 있는 원숭이 모양의 조각을 말한다. 건물 네 모서리 추녀 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혹자는 ‘벌거벗은 사람’의 모습이라고도 한다. 이를 두고 ‘사찰을 짓던 도편수를 배신한 여인의 참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에렉테이온 신전의 여상주(女象柱)를 두고 ‘배신한 카리아 지방의 여인들’을 상징한다고 규정해버린 것과 다르지 않겠다. 관광지의 통설로는 아직도 그렇게 받아들인다지만, 건축사적으로는 고졸기 그리스 시대까지 좀 더 거슬러 올라가 기둥의 조각적 발달에서 기원했음을 밝혀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의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도교와도 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어쩌면 이 원숭이 나부상도 도가와 관련된 것일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묘인 닛코(日光)의 도쇼구(東照宮)에 조각된 원숭이상을 떠올려서는 안된다고 누가 확신하겠는가. 여기도 ‘철수와 영희’의 법칙은 여전히 통용된다. 이 나부상의 정체도 단순히 전설로만 회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간이 없어 대웅보전 밖에 둘러보지 못했던 것은 내내 아쉽다. 오늘은 우리 가족에게 예정에 없었던 강화도 답사였다. 가장 먼저 강화역사박물관에 들렀으나 코로나로 인해 보지 못했고, 기대했던 성공회강화성당도 역시 굳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강화 고인돌을 보여주었고, 아쉬움이 많아 오히려 다시 이곳에 와야 할 빌미가 생겼다. 깜깜해진 길을 내려가며 은근슬쩍 남편이 아이 손을 잡고 나를 앞서기 시작한다. 우리 가족의 답사 규칙이다.
건축물을 찾아다녀야 하는 나를 위해 남편이 아이를 담당한다. 사진 찍는 동안 아이를 챙기고, 대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내가 부자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준다. 이런 암묵적 규칙이 대충 몇 해 전부터 자리잡힌 것 같다. 아이가 제대로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앞서가는 남편과 아이의 뒷모습을 찍어주며, 오늘에 또 감사했다. 부디 남편의 카톡 프사로 애용되길 바란다.
내려가는 길도 삼랑성 남문 밑을 지나야 한다. 남문 위의 종해루(宗海樓) 건물에 조명이 들어왔다.
전등사(傳燈寺). ‘전등’은 불법의 등불을 뜻한다고 한다. 굳이 여기서 러스킨의 <건축의 일곱 등불>을 떠올린다면 누군가는 진부하다 하겠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리를 밝히는 불이든 건축의 갈 길을 밝히는 불이든, 찾을 수 있다면 따라야 마땅할 것 같다. 아직 학문의 망망대해에서 가끔 갈 곳을 잃어버리는 나는 어떤 불빛이라도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