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주고 꽃을 사본 적이 별로 없다. 누군가에게 줄 선물로 지갑을 연 적은 있으나, 오직 내 공간에 꽂기 위한 목적으로 사본 적은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꽃시장이 있는 강남고속터미널의 도보 10분거리에 사는 데도 말이다. 우리 동네 맘카페에는 "오늘은 아침부터 꽃시장에 들렀네요^^"라는 글이 꽤나 정기적으로 올라오지만, 언뜻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다. 솔직히 이건 비밀이다. ('굳이, 왜, 뭐하러, 아침부터, 그시간에?'라는 각종 퉁명스러움이 불뚝불뚝.)
내가 꽃에 시큰둥하다는 것을 남편은 잘 알고 있다. 연애를 시작하던 무렵, 나는 '꽃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일부러 사지 않아도 된다'며 멋있는 척을 떨었다. 그 말은 어찌나 잘 지키던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에게서 꽃을 받은 기억은 딱 두 번. 나의 박사 졸업식과 학술상 시상식. 다른 약속은 다 까먹어도 그 당부는 참 인상깊었나 보다. 취향을 잘 파악해주니 고맙고, 불만은 없다.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고, 대신 다른 선물은 실컷 받았으므로.
그러나 이런 우리집에도 가끔 꽃병이 등장하는 때가 있다. 간혹 집에 놀러오는 손님에게서 꽃선물을 받을 때면 급하게 꽃병으로 쓸 만한 것을 찾느라 바빠진다. 몇 년에 한번이긴 하지만, 초록색의 줄기와 형형색색의 송이들이 공간을 밝히는 능력에 새삼 놀라기도 한다. 본질적으로 꽃의 아름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아닌 것은 확인되는 셈이다. 단 제대로 된 꽃병이 하나도 없어 예쁜 꽃들이 간혹 엄한 곳에 꽂히는 문제가 있다.
잊고 있었던 꽃의 매력에 이따금씩 놀랄 때면, '가끔 우리집에도 꽃을 좀 들여볼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감흥도 잠시. 곧 시들어 처리해야 하는 수고가 더 크게 다가오며, 앞서 며칠간의 감동이 그 몇 배의 속도로 쇠퇴한다. 시든 꽃과 함께 그 마음도 종량제 봉투에 함께 쓸어담으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다. 지금은 예뻐도 곧 시들어서 결국은 버리게 될꺼라는, 울트라 스피드 현자타임.
그렇다면 아예 화분을 키우면 어떤가, 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화분을 잘 돌볼 자신도 없다. 이건 순전히 신혼시절의 경험 때문인데, 첫 집들이때 받은 대형화분도 몇 달을 가지 못했다. 일명 '행복나무'라는 그 식물은 약간 고무나무 줄기에 아보카도 잎사귀 같은 것을 달고 있었더랬다. "물은 일주일에 한번만 듬뿍 주면 된대~"라며 선물을 받았는데, 그 '일주일에 한 번'이 우리에겐 너무 중노동이었다.
혼자서 들기도 힘든 화분을 세수대야 안에 들어 놓고, 물을 주고, 물빠지길 기다리고, 다시 대야물을 버리고, 닦아내고 등의 반복 동작이 너무 고되었다. 물을 너무 열심히 주었던 탓인지 그 반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 나무를 '처치'하면서, 남편도 나도, 우린 다시 식물같은거 키우지 말자고 다짐했더랬다.
그렇게 우리집은 무미건조한 곳이 되었다. 식물이 주는 청량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나의 노동이 더 아깝게 여겨지는 탓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최근 유행하는 '반려식물'이라는 단어조차도 내겐 전부 '노동'으로 인식된다.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처럼 마음이 열리지 않으니 이것 참 큰일이다. 꽃을 사오고, 다듬고, 예쁘게 담고, 다시 버려야하는 수고를 즐겁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왜 꽃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래, 좀 있어보이게 변명하려 해도 이유는 이것 하나구나. '게을러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스스로를 합리화해 본다면, 곧 떠나버릴 것에 대해서는 굳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정도? 아니, 그냥 게을러서이다.
그러니 혹시 우리 집에 방문하시는 손님이 계시다면,
꽃 대신 먹을 것을 사오시면 좋겠다.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꽃보다 빵'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