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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an 19. 2016

[포토에세이] 그냥 조금만 더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그냥 조금만 더>



"토요일에 뭐하세요? 저랑 파트너 하시죠. 한 번 안 가실랍니까?" 별다른 약속도 없다. 경험도 쌓으면 좋겠다 싶어 십여 년 가까이 탁구를 하고 있는 남자 회원과 시합을 나가게 되었다. 현장에 도착해서 둘러보니 말이 친선이지, 생각보다 참가팀도 많았고, 경쾌한 공소리, 주고 받는 자세만 보아도 실력이 쟁쟁한 분들이 오셨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2인 1조, 여섯 팀으로 구성된 조별로 단식-단식-복식으로 예선을 치른 후, 결선에서는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시합이다. 점수판 앞에 대진표가 배치되고 경기 결과 기록지가 놓였다(나는 아직 탁구 경기 진행 방식과 초등학생의 받아 쓰기 노트 같은 점수판 위에 앉은 승패의 해석 능력이 없다). 마냥 탁구가 좋아 경기장에서 선수들 뛰는 것만 보아도 덩달아 가슴이 뛰고, 열전의 시합을 구경만 해도 눈이 부시어 넋이 나갈 정도이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선전 결과는 열전 열패, 결국 나와 파트너는 예선에서 탈락하였다. 파트너는 무안하게 웃는 나에게 "이런 경험도 필요합니다. 커 가는 과정이고,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거든요"이라고 위로 해주셨다.


나는 오히려 그런 선배의 격려가 더 미안하여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나에게도 언젠가 ‘이기는 탁구’, 그런 플레이를 펼칠 날이 오기는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줘도 걷어올리고, 길게 줘도 걷어올리고. 아무것도 통하지 않고,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은 상실감, 그 이상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었다. 경기가 이어질수록 상대의 기선에 제압당한다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무력함에 무릎을 꿇고 마는 자신이 처참하기까지 했다(아! 이래서 맨탈이 중요하다는 것인가).


의욕도 사라지고, 의욕이 사라지니 집중력도 떨어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니 제대로 된 선전이 나올 리가 있겠나. 차라리 어서 시합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겸손한 투지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나에게 탁구는 무리구나, 다시는 시합에 나가지 말아야지, 자조 섞인 한숨과 함께 우물 안에서 물장구나 치면서 노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내 안에서 변명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무슨 해괴한 합리란 말인가.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주지도 않은 상처를 저 스스로 받아 넘어진 꼴이었다. 일어서기 보다 좌절에 무게를 둔 탓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시합에서 지더라도 재미있게 탁구를 즐기는 사람과 그 후로 흥미를 잃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즐기는 사람은 더욱 재미있게 운동할 것이며 그에 따라 실력도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탁구를 접는 경우까지 생길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일에 재미가 있을 때, 즐거울 때 실력이 늘어나고 성적도 좋아질 것이다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극복하고 긍정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더 노력하는 것, 어찌 탁구에만 적용되는 말일까. 다시 생각한다. 생활 체육은 말 그대로 생활 속에서 즐겁게 운동하자는 것이지, 반드시 이기자는 체육이 아니다. 경기에서 패했다고 인생까지 패한 것은 아니라는 말에서 힘을 얻는다.


일찍 시작하여 오랫동안 연습의 길에 서서 배우고 또 배워온 사람을 이겨보겠다는 것은 어쩌면 오만이요, 무모함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노력의 대가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중요한 일의 성취를 위하여 필요한 마음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초심, 열심, 뒷심이 그것인데 처음으로 탁구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던 날의 설레던 초심을 떠올린다. 나의 초심 속에 분명 열심히 해보겠다는 다짐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뒷심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금 일어서자고 다짐해 본다. 무한히 열린 가능성에 무심히 해 보는 것. 그냥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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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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