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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an 20. 2016

[포토에세이]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며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며>



소장님! 이거 한 번 봐주세요. 보름 전에 면에 가서 건강검진받은 거시기가 나온 모양인디, 눈이 어두워서 당췌 글자가 안 보여가꼬(이미 밝혔듯이 ‘눈이 어두워서 당췌’, 이 말씀은 노안(老眼)으로 시력이 저하되어 잘 안 보이는 상태를 이름이 아니라 ‘문맹(文盲)’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나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 씨가 내민 것은 일반 건강검진 결과 통보서이다. 일반 건강검진이라 함은 고혈압, 당뇨병 등 일반 건강검진항목과 생애전환기(만 40세, 66세)에 필요한 골밀도 검사, 노인신체기능 검사, 정신건강 검사, 인지기능장애 검사, 치면세균막 검사, 생활습관 평가 등을 실시하는 성별, 연령별 특성을 고려한 국가건강검진이다.


정 씨의 건강검진 결과 종합소견은 다음과 같다. 정상B, 일반 질환 의심, 유질환자(고혈압). 고혈압의 기왕력(旣往歷)이 있으니 지속적인 치료와 관리가 요망됨. 기타 흉부 질환으로 우폐중간부위국소결절성음영(암 의심), 우측늑막변화(CT검사) 상담 및 추적 검사 요망됨. '바로 조치'라는 문구는 굵고 이탤릭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괄호 열고 암 의심 괄호 닫고, 그 부분이다. '흉부촬영 검사 결과 이상 소견이 보입니다. 정밀 검사가 필요하므로 적극적인 관리를 요합니다'라는 내과검진센터의 영상의학 전문의의 판단 뿐 아니라, 빠른 시간 내에 전화나 직접 방문을 요한다는 소견이 적힌 별지(別紙)가 첨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암 의심’이라는 글자 위를 덮은 꽃분홍 형광펜이 화살처럼 내 안으로 들어왔다.


한편으로 글을 읽지 못하여 결과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 씨가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앞뒤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암'이라는 글자만 읽어낸 어르신들이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근심에 사로잡혀 기운을 잃고 있다가 보건진료소를 찾아오는 일을 종종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혹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


전문의의 의견대로 추적 검사 후 '암 의심'이 이 암, 또는 암 아님이라는 확진을 받기까지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 가족 간 협력을 영상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평화롭고 조용하던 일상이 갑자기 스산스러운 비일상으로 변화한다. 기분이 어수선하다. 정 씨에게는 아들 셋, 딸 셋이 있다. 아버님, 결과서를 아드님이나 따님에게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큰아드님에게 연락하면 좋을 것 같은데,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소장님, 우리 큰아는 외국에 나가 있네. 갸는 바빠서 얼굴도 못 보고 사는디. 셋째한테 연락하면 모를까. 정 씨가 목에 건 휴대폰을 내민다. 딸의 연락처를 찾아 기록하였다. 환자가 밀려 있으니 따님과 통화한 후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정 씨는 집으로 돌아갔다.


있는 그대로 설명드려야 옳을 것이다. 정 씨의 건강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왔음이 감지되는데 왜 나는 정 씨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고 딸에게 알리기를 선택하는가. <사실대로 말하기와 기만> 사이에서 또 다시 윤리적 딜레마로 저울질하는 나를 발견한다. 정 씨보다 자녀에게 사실을 말함으로 환자가 알아야 할 권리를 ‘기만’하는.


나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인지능력이 저하된 것도 아니고, 일상생활을 수행하지 못 할 정도로 병상에 누워 있는 것도 아닌데, 이것은 정 씨와 내가 지켜야 할 믿음과 의리(信義)의 문제가 아닌가. 아버님! 결과를 보니, 별 것 아닙니다. 더 알아봐야겠지만요, 만약에, 이건 만약인데요, 만약에요, 만약에 암에 걸렸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걸렸으면 그냥 걸려야지, 뭐. 이 나이에 이제 죽은들 여한이 있겠나. 늙고 힘도 없어서 내년 농사도 못 짓겠고, 낼모레면 아흔인디 갈 때도 되았지 뭐. 만약에, 또 만약에요, 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고 한다면 수술하실 거예요? 미쳤어? 수술은 무슨 수술. 그냥 아프다가 하날님이 오라 그러면 가야지.


전체 검진자의 38.5%가 초기에 질병을 발견하였으며, 건강검진을 꾸준히 받은 사람은 받지 않은 사람에 비하여 7년간 병원진료비를 109만 원 적게 쓴 것으로 나타났다는 분석 결과가 있다. 별 일이야 있겠냐마는, 만약이라는 조건을 달고 농담을 하게 되는 것은 61.5%의 그룹에 정 씨가 서 있기를 바람이며, 이 상황이 나의 경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반문이기도 할 것이다.


안녕하세요?/저는무주군포내리에있는상곡보건진료소에근무하는박도순보건진료소장입니다/여러차례전화를드렸는데받지않으셔서이렇게메시지드립니다/고향에계신부모님의건강검진결과와관련하여드릴말씀이있어전화드렸습니다/꼭연락주시기바랍니다/고맙습니다     


두 시간이 지났다.

나는 그녀의 전화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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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북창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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