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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an 28. 2016

[포토에세이] 거기 있는 당신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거기 있는 당신>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바닥에 앉은 당신이 번쩍거리는 그것을 귀에 갖다 댄다. 나는 빨대 안으로 훅 빨려 들어온 망고주스를 입 안 가득 무는 순간이었다. 다음 동작을 멈출 수밖에. 테이크아웃 커피숍에 당신이 들어설 때에만 해도 기차 시간이 남아 차 한 잔 마시려고 들어온 어르신이려니 생각하였다.


고객님! 커피 나왔습니다. 테이블 두 개만큼 떨어진 곳에 앉은 당신을 나는 안보는 척 다 본다. 고객님! 커피 나왔습니다. 못 듣는 것인가, 안 듣는 것인가. 처음보다 조금 더 소리가 커진 남자 점원의 목소리, 그는 한 번 더 벨을 눌렀을 것이다. 네모난 무선호출벨이 바르르 몸을 떤다. 당신은 그것을 다시 귀에 대더니, 여보세요.


고객님! 커피 나왔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진동벨이 울렸을 때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테이션으로 그것을 가지러 갔어야 옳다. 기다리던 점원이 커피를 받쳐 들고 당신에게 다가간다. 점원은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나는 여전히 안 보는 척, 그러나 당신에게서 거둘 수 없는 시선.


커피잔을 두 손으로 잠시 잡던 당신, 뚜껑을 열려는 모양이다. 안 열린다. 아니, 못 연다.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여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점원을 부르지 않는다. 포기한 듯하다. 나는 이 상황에서 일어나 도와야 하나 주저주저 망설였다. 결정을 내리지 못 하겠다. 점원이 다시 다가간다.


그는 빨대를 꽂아 주고, 흘린 커피를 말없이 닦고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내가 당신을 도와야 할 의무는 없다. 당신은 이런 커피숍에 처음 온 사람이라 잘 모르는 것일 뿐인 거지. 도시형(!) 커피숍에 처음 들어섰을 때 길고 복잡한 메뉴의 속성을 몰라 달달한 거, 그냥 달달한 것으로 한 잔 주세요라고 주문한 적이 있었어.


아.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은 다르다 말이지. 당신에게는 지금 설명이 필요하다. 업계에서 정하고 아침마다 외쳤을, 사랑합니다 고객님! 그러한 응대 매뉴얼이 아닌 가게에 처음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고 마실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당신에게 필요한 매뉴얼 말이다. 무엇이 나를 망설이게 하는가.


전국이 꽁꽁 얼어붙은 한파가 몰아닥쳤던 그 주말, 사람들의 약속은 취소되고 비행기는 하늘을 날지 못하던 그 주말, 배는 바다를 가르지 못했던 그 주말. 기차를 타고 달려간 부산에서 호텔에 체크인을 마치고 여장을 푸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벗어났다는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그 주말.


저녁 여덟 시만 넘으면 동네 강아지도 잠들어 캄캄하고 조용한 산골에서 지내다 자정이 훨씬 넘었는데도 휘황한 조명들이 밤을 낮처럼 설쳐대게 만드는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제발 밤 좀 쉬게 해 주었으면. 밤을 낮 삼아 해운대를 거닐었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사람들 틈새에 국제 시장.


헌 책방 골목에서 오래된 사진집을 들추며 회상에 젖다가 단팥죽을 호호 불어가며 언 손을 녹였어. 어묵을 먹고 호떡을 먹으며 짧은 하루 휴가 호사를 누렸다. 부산역에 도착했고 우리는 커피숍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아메리카노 석 잔, 망고 주스 두 잔. 집에 돌아온 나는 이 일을 딸에게 이야기하였다.


고작 업장에서 매뉴얼 수준으로 고객을 응대한 알바생의 배려가 아쉬운 상황이었다고 공분하며, 어르신을 더 공경할 수 없었을까 따져 물었다. 매뉴얼식 응대가 아니라 매뉴얼 이상의 배려를 베풀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엄마도 그런 말씀하실 자격이 없네요. 그 상황에서 엄마도 결국은 그분에게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했잖아요. 뒤돌아 문을 닫고 나오는 우리에게 고객님 행복하세요, 짜증이 난다. 영혼 없는 인사 이제 그만. 행복 없는 행복 타령 이제 그만.  먹다 만 망고 주스 내려놓고 씁쓸한 뒷맛을 안고 우리는 가게를 나왔었어.


카페 5만 개, 6년 만에 3배 가까운 성장을 했다는, 242억 잔의 커피. 이 정도면 커피숍이 아니라 그곳은 이미 국민 사랑방이다. 추운 칼바람을 피하여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아랫목 같은 따스함을 느끼게 하기 위한 작은 배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따스함의 온도는 몇 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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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끓는다.

물이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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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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