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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Feb 23. 2016

[포토에세이] 오래된 프로포즈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오래된 프로포즈>


자신의 체구보다 커 보이는 검푸른 양복, 빨강 넥타이가 돋보였다. 캠퍼스에서는 늘 연한 하늘색 잠바에 청바지를 즐겨 입던 그였다. 끈이 길고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던 그가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앉아 있다가 일어선다. 너무나 어색하여 나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평소 하던 대로 반말로 이야기해야 하나, 존댓말로 인사부터 해야 하나 망설였다.


테이블 가까이 다가가 앞에 앉으려니 그가 나의 두 손을 잡는다. 저기, 앞으로는 제 앞에 앉지 마시고, 제 옆에 앉아주는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그가 먼저 존대를 한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의 옆에 앉고 말았다. <앞이 아니라 옆에 앉아주는 사람이 되어달라>. 이것이 그가 나에게 말한 프러포즈다. 독특할 것도 없는 이 짧은 ‘선포’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사랑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와 나는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시작되는 만남은 자정이 넘어도 헤어지기가 아쉬웠고, 캠퍼스를 돌고 돌아도 함께한 시간은 짧기만 했다. 이런 추억이 되살아난 것은 며칠 전 대청소를 하던 날, 이불 정리를 하면서부터였다.


장롱을 열었다. 이불을 꺼내놓고 깊숙한 곳에 보관 되어 있던 편지함을 발견하고는 정리가 뒷전이 되었다. 오래된 그것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받았던 첫 편지가, 고색(古色)한 청춘이, 빛바랜 시간 속에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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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21일 토요일 여행을 앞두고     


나의 새로운 정리를 위한 여행의 출발을 앞두고 적는다. 이번 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의 나의 일그러짐을 정리하고 동시에 나의 마음을 한 여인에게 향하기 위함이다. 내가 한 여인을 그리워하면서도 나의 마음을 그 여인에게 두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은 것 같다.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는 나와 무척 사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모른 척하면서 거짓된 마음으로 포장하면서 그녀를 멀리 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까,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그렇게 괴로워할 때 나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렸는지 그녀가 그것을 이해할까.


사랑하고자 다가오는 여인을 받아주지 못하고 나의 찌그러진 과거에 발목 잡혀 있는 것과 그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함, 이런 나의 부족함으로 포기해야만 하는 나의 마음을 그녀가 알까.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녀나 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위장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내가 한 여인을 불행으로 몰고갈 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그녀에게서 많은 좋은 점과 나보다 훨씬 우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언뜻언뜻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느낄 때마다 나는 희비가 엇갈렸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내 앞에서 외로움과 쓸쓸한 모습을 내비쳤다. 나는 그때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녀를 외면할수록 그녀를 만날수록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나의 부정이 크면 클수록 그녀는 나의 마음에 눈이 뭉쳐지듯 더욱 크게 차올랐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녀에게로 나의 발길이 옮겨졌다. 왜 그런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모른다. 다만 모든 것을 주어도 주어도 내 몸의 일부가 닳아 없어질지라도 아깝지 않은 그 무엇이라는 것에 대하여 동감한다. 금방 피었다 시들어버리는 꽃이 아니라 사계절 변함없는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것이라는 것에 동감한다. 나도 그녀에게도 결점이 있다. 이 결점을 서로 어떻게 해결하고 감싸 줄 것인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해결되지 않을까, 서로 그것을 고쳐주고 서로 좋은 충고를 가한다면 좋아질 것이라는 결론이다. 결점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녀에게, 그녀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두렵다. 과연 그녀가 나의 마음을 받아주고 안아줄까. 내가 지금 이러한 감정을 맛보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서인가. 나에게 도피심 대신 도전성을 심어준 그녀를 용감하게 선택하고자 한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져버리고 그녀를 선택했는데 그녀가 나를 비굴하게 만들었을 대 나는 그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실컷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증오가 깊어만 간다. 마음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내가 미쳐버릴 것 같다. 배낭을 싼다. 마음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나기 앞서 글을 남긴다. 꾸밈없이 남기는 글이나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꼭 끝까지 읽어주길 바라며.


또 비가 내린다. 지리산 등반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어머니의 불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섰다. 하필이면 이렇게 비가 쏟아지다니. 어머니는 나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없다. 나도 어머니에게 이 심정을 털어놓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어디로 가는 버스인지 모르겠다. 제대로 잘 탔을 것이다. 첫 차에 몸을 싣고 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초록 나무들에게 묻고 싶다.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듯 빗물이 줄줄 흐른다.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빈자리에 가방만이 나를 지키고 있다. 그녀가 내 옆에 있다면 한층 위로가 될 것인데.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마음을 정리하고자 밖으로 나왔지만 허전하고 어수선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어느 톨게이트에 차가 멈추었다.


지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모르겠다. 내 감정을 스스로 감추고 속였다는 죄책감이 크다. 그러나 나도 여러 가지 형편이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마음을 털어놓지 못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나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에서 내 눈 앞에 어른거리는 한 여인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바쳐보련다. 어느 터미널 긴 의자에 앉아 첫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의 이름을 알고 싶지도 않다. 굵은 비는 가랑비로 변해가고 있다. 이번 여행처럼 처참히 어긋나고 외롭고 후회스러운 여행이 있었나. 지금은 텅 비어 있는 나의 마음에 한 여인으로 채우고 싶다. 나 홀로 가슴앓이하다 끝날 사랑이라 하여도 죽도록 사랑하여 보리라.


남원을 지나 구례에 도착했다. 압록의 작은 강에 비가 내린 탓이다. 물이 불었다. 흙물이 섞여있긴 하지만 여전히 도도하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마음은 잔잔해지지 않는다. 강둑이 터지듯 그녀와 말문을 열고 싶다.  쌍계사를 지나 1시간쯤 걸어올 라온 것 같다. 경치가 좋은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웅장하고 대단하다. 물소리가 힘차다. 나도 힘차게 전진하련다. 이곳은 무슨 역인가. 이름을 알고 싶지도 않다. 내리자마자 하행선 기차를 타고 있다가 창문 너머 가락국수 500원. 끼니를 해결하였다.


불일폭포 쌍계사에서 나의 허전함을 달랜다. 구례에 가는 승차권을 구입했다. 많은 무리들의 즐거운 모습이 나와 대조된다. 나의 마음을 이야기하려고 해도 오래된 깊은 상처가 떠올라 괴롭다. 온몸을 구타당하여 피로 멍든 아픔을 다시 맛볼까 두렵다. 나의 마음을 그녀는 이해할까. 구름으로 가려진 하늘이 서서히 열리고 있다. 글로 이야기를 쏟아내니 마음도 하늘처럼 열리는 것 같다. 구례에 오전 10시 49분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들린다. 기차의 흔들림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여행을 마치면 내가 용기 있게 그녀 앞에 나설 수 있을까. 용기가 없을 것 같군. 이 편지에 속마음을 털어놓아서일까. 더욱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 힘을 주오. 다시 한 번 더 너의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기를. 구례를 향하는 길에. 홀로 남아 창밖을 본다.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린다. 남원역이다. 한쪽 구석이 환하게 들어온다. 친구들과 어울려 역 광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지. 노래를 불렀었어. 우리에게도 즐거운 추억이 있었는데. 주산역을 지나는데 아카시아 꽃숲이 밀림처럼 우거졌다. 교생 실습을 마치면 친구들과 다시 한 번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마음을 정리하고 전주로 다시 올라간다. 집으로 간다. 어머님이 계신, 친구들이 있는 그곳으로 간다. 구례역 한쪽 구석에서 이 글을 쓴다. 육체는 고단하나 마음이 평온하다. 나는 편지로 그녀와 여행을 함께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진실된 마음을 담았으며 표현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쓰지 못한 것은 사정상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한다.


그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그리고 나의 이런 마음을 받아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면, <5월 26일 저녁 9시 30분>, 학교 앞 <학림다방>에서 만나기를 원한다. 나는 이제 잠을 청하련다. 꼭 나올 줄로 믿으며 기다릴 것이다.

1988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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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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