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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ul 31. 2016

[포토에세이] 겉사랑 속사랑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겉사랑 속사랑>


옷장 정리를 해 보면 안다. 보이지 않는 사이 아이들이 훌쩍 자랐다는 것을. 조카들에게 보내기 위하여 철 지난 작은 옷들을 따로 모았다. 옷을 나누는 중 바지와 윗도리 안쪽 상표에 검은색 혹은 붉은색 실로 수 놓아진 십(十)자 모양이 눈에 뜨인다. 이 표시는 생후 이 년 동안 쌍둥이 중 동생, 예찬이를 돌봐주신 어머니의 손자 사랑 증표이다.


“아가! 애비 들어왔냐?”로 시작되는 안부 뒤에는 “우리 ‘예찬이’, 아니 쌍둥이 잘 지내냐?”가 이어진다. 어머니는 또 예찬이 이름부터 부른다. 아닌듯 이내 얼버무리셨지만 나는 안다. “택배 보냈다. 집 앞에 있는 마트에 갔더니 세일하더라. 바지랑 윗도리랑 보냈으니 바뀌지 않도록 신경 좀 써서 입히거라.”


같은 색상, 같은 디자인의 옷인데도 어머니는 왜 굳이 따로 입히라 하시는가. 예찬이 옷 안감 보이지 않는 곳에 색실로, 때로는 굵은 펜으로 표시하여 보내셨는데, 나는 그것이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속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보건진료소의 업무와 쌍둥이를 돌본다는 것은 내게 벅찬 일이었다. 출산 휴가를 마치고 복직을 며칠 앞둔 날, 어머니와 나는 서로 한 명씩 돌보기로 하고 마주 앉았다. “어머니, 제가 누구를 데리고 갈까요?” “ 그래도 애미인 네가 큰아들을 데리고 가야 되지않겄느냐? 그리해라.” 쌍둥이는 그렇게 헤어졌다. 형은 나에게, 동생은 할머니에게 양육되었다. 그리고는 주말에 만나게 되었다.


업무와 양육에 지친 나는 금요일 오후가 되면 이제 좀 쉴 수 있겠다는 안도감보다는 주말이면 남편과 시부모님, 쌍둥이 누나들까지 한자리에 모이니 더 비장한 각오로 토요일과 일요일을 지냈던 기억이 새롭다. 여덟 식구가 모이면 아이들은 웃고 떠들고, 울고 뛰고, 어른들은 말리고 타이르느라 한바탕 소란스러운 전쟁 그 자체였다. 그러는 중 쌍둥이가 두 돌이 지났다.


아이들을 너무 오랫동안 떼어 놓으면 안 좋다는 어느 교수의 말씀을 들으셨다며, 어머니는 나에게 예찬이를 데려가라고 하셨다. 나는 동의했고, 그후 쌍둥이는 보건진료소에서 함께 자라게 되었다. 할머니 무릎에서 자라던 예찬이가 형과 친엄마를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겠냐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예찬이가 우리에게 오던 날 저녁이었다.

 

할머니를 찾으며 울기 시작하는데 1시간, 2시간이 지나도 울부짖음은 그칠 줄 몰랐다. 하루가 지나고 사흘이 지났는데도 계속되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어디 너 울테면 실컷 울어 봐라! 하며 내버려두었다. 옆에 있던 예빈이가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급기야 함께 울었다. 나는 분명 친엄마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게서 ‘분리’된 예찬이의 불안한 고통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몰라 난감한 상황에서 적잖이 당황했다.


예찬이와 어머니(할머니) 사이에 만들어진 ‘애착 관계’는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헤어지던 날 밤부터 극심하게 울어 재낀 예찬이의 분리 불안을 보면서 나는 다만 생물학적 겉엄마일 뿐이라는 생각에 무기력해졌다. 예찬이는 자라면서 할머니 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의 관계가 확장되었으나 어머니에게 사랑은 지금도 오직 예찬이 한 사람 뿐이다.


같은 옷을 사면서도 특별히 ‘이것은 예찬이 것’라는 표시로 당신의 속사랑을 못내 감추지 못하시는 어머니. 예찬이의 내면에 잠재한 정서적 어머니와 안전 기지도 여전히 ‘할머니’일 것이다. 꾸중을 듣거나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경우 예찬이 눈 속에서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발견한다. 이제 아이들이 자라 더는 쌍둥이 옷에 색실로 표시를 남기는 겉사랑은 사라졌다. 옷장을 정리하며 지워지지 않은 옷 위의 속사랑 흔적들을 다시 본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속사랑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시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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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도서출판 생명의 양식, 2014. 03/0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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