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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27. 2015

[포토에세이] 봄날 단상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봄날 단상>



이른 아침 보건진료소 옆에 사는 정 씨 할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했다가 아들네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하셨다. 당신의 안부와 이웃 사람들에 대한 안부로 밀린 인사가 길다. 보건진료소 뒤 울타리 너머에 있는 두릅나무에 새 순이 돋아 마침 먹을 때가 되었을 것이니 늦기 전에 꺾어 먹으라는 전화이다. 두터운 장갑을 끼고, 뒤뜰에 나가 보니 어느새 이렇게 자랐나 싶다. 담벼락으로 올라섰다. 쭉 뻗어 키가 자란 두릅나무 끝으로 새로 돋은 여린 순 사이로 아침 햇살이 반짝인다. 하나 둘 가지를 꺾어 내려놓으니 몇 끼 식사는 족히 하고도 남을 만큼 푸짐하다. 각양 나무에서 여린 순이 돋아 연신록이 수채화를 완성하는 아름다운 4월.


산촌에는 온갖 산나물이 잔치를 벌인다. 겨우내 긴 잠을 깨고 이제 막 세수를 마친 아이 얼굴 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내미는 취나물의 여린 순, 옴팡진 두 손을 앙다문 아가손 같은 귀여운 고사리들. 강된장에 고추장을 넣어 버무린 양념장 하나에 찬밥 한 덩이를 망태에 지고 아침마다 산에 오르는 어르신들은 보노라면 마치 소풍 길에 오르는 아이들 같다.


굳센 가시가 많고, 잎은 가지 끝에 돋아 있는 두릅나무를 당겨 그 순을 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칫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연약한 가지는 쉽게 부러진다. 예전에는 두릅을 꺾으려면 높은 산에 올라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식용과 약용으로 재배가 늘어나 쉽게 먹을 수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았고, 얻기가 쉽지 않아 맛보기 또한 어려운 고급 나물 중 하나이다. 취나물과 엄나무 순, 몇 안 되는 두릅나물을 삶아 데쳐서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 무친 것을 드셔 보았는가. 한 입 먹노라면 온몸으로 봄의 기운이 확산되는 기분이지. 연한 두릅에는 나무를 닮은 가시가 있어 뜨거운 밥에 한 젓가락 올려 깨물면 가시는 입안에서 잇몸을 간지럽혀, 야들야들 씹히는 식감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양지바른 계곡이나 숲 속에 옹기종기 모여 군락을 이루는 두릅, 자라나는 속도가 빠르고 줄기가 올곧다. 가을까지 잎줄기가 무성하여 하늘에 우산을 펼친듯한 수형(樹型)을 이루고, 겨울이면 엉성한 막대기처럼 가지만 남는 나무. 이른 봄이면 어린 순에 상큼한 향이 입맛을 돌게 하는 건강 음식재료로 단연 인기가 높은 나물. 산중 나물의 왕좌일 것이다. 봄 한 철, 두릅나무 한 그루에서 새순을 열 모숨 이상은 거뜬히 따낼 수도 있다 하니, 그의 성장이 얼마나 빠른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가지가 곧게 자라고, 원줄기가 훼손되면 측아(側芽)에서 나온 줄기가 새로운 원줄기를 대신하는 것만 보아도 그의 생명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두릅나무는 수명이 짧아 보통 15년 정도이면 최고령으로 간주된다는데 성장 속도가  빠른 데다가 장수까지 한다면 그것은 자연계에서 불공평한 일이라 했던가.


굵고 억센 가시도 많고, 잎사귀의 가장자리에는 큰 톱니가 있고, 약한 방향(芳香)까지 풍기는 두릅. 나무 꼭대기에 벙긋 솟은 어린 순을 꺾어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두릅초회는 별미 중 별미이다. 데친 후에 소금과 깨소금으로 양념한 후 꼬챙이에 꿰어 밀가루를 바르고 달걀을 입혀 지져내는 두릅적의 맛은 더 말하여 무엇하리.


소쿠리에 담긴 두릅을 손질하며 생각한다. 남에게 상처 주는 말 가시로 찌르고, 남에게 아픔 주는 행동 가시로 톡톡 쏘기도 하겠지. 쭉뻗어 곧은 것이 좋은 줄만 알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개를 치세우는 교만으로 알랑거릴 때는 얼마나 많은가. 어디 그뿐일까마는. 모순(矛盾) 같은 나에게, 짧은 봄날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성하여 입맛 돋우는데 제격이라는 두릅순이 품은 방향(芳香)처럼, 나에게도 그런 향기 한 점 있었으면. 이른 아침 밀린 안부로 인사를 나눠주고, 잎이 더 피기 전에, 어서 따서 나물 반찬으로 해먹으라는 정 씨 할아버지의 마음씀이 그래서 더욱 따뜻하고 감사하다.


물이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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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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