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호사 박도순 Oct 28. 2015

[포토에세이] 아버지의 주례사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아버지의 주례사>



은정이가 암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하여 다니던 대학병원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동안 그렇게 잊은 듯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기들이 모이는 단체 카톡방에 좋은 오빠를 만났고 곧 결혼한다는 소식이 모바일 청첩장과 함께 올라왔다. 동기들의 축하 메시지가 초를 다투어 펑펑펑 이어졌다.


며칠 후 기쁜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통영으로 달려갔다. 맑고 깨끗한 바닷가. 작은 소나무 숲 속에 마련된 결혼식장이 이색적이었다. 결혼식장 입구에서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손님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은정이와 대학원 동기입니다. 축하합니다. 정말 고우세요!" "저는 어머니가 아니라 작은엄마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기, 우리 은정이가 마음 단단히 먹고 왔으니, 어머니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구나. 신부대기실에서 만난 은정이는 백설보다 더 눈이 부셨다. 하얀 면사포, 웨딩드레스, 우아한 부케, 웃는 얼굴, 그 아름다움을 무엇에 비하리.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며 축하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나와 남편은 먼저 결혼식장으로 들어섰다. 사회자의 안내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여러분! 오늘의 결혼식은 특별합니다.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전하는 혼인서약을 할 것입니다. 신부 아버지의 덕담이 주례를 대신할 것이며, 신랑 아버지께서 성혼 선언문을 낭독해주실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양가 부모님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인 내빈 여러분도 주인공이십니다. 신랑과 신부, 하객의 진심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오늘 결혼식은 일반적인 주례사를 생략하고, 주례 없는 결혼식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결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마치 공장에서 신혼부부라는 물건을 찍어내듯 1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결혼식에 익숙한 요즘, 나에게 이 결혼식은 신선하다 못해 깜짝 놀랄만한 축하의 자리였다. 촛불이 켜지고, 결혼식이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신랑 친구들이 준비한 태권도 시범 공연이 끝나고, 드디어 은정이 아버지가 단상으로 올라오신다. 친정아버지가 전하는 주례는 과연 어떤 말씀일까 기대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사랑하는 딸 은정아, 그리고 우리 아들이자 사위 혁준에게 전한다. 신혼 가정은 깨가 쏟아지는 곳이 아니라 깨를 만들어 내는 곳이란다. 깨를 만들려면 수고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남편은 밖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아내와 가정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줘야 한다. 아내는 지혜로워야 하고 여성성을 유지해야 한다. 남편에게 사랑만을  요구하기보다 먼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아내가 되길 바란다. 서로 아껴주고 믿음으로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딸과 사위가 되어주길 바란다. 사랑한다. 잘 살아라!"



짧은 주례사, 그러나 긴 여운의 메시지에 하객들은 일어나 박수로 화답했다. 신랑 신부의 친구들은 환호했다. 친정아버지의 주례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어린다. 신혼부부를 두고 우리는 흔히 ‘깨소금이 쏟아진다’는 표현을 쓴다. 사랑으로 만난 젊은 남녀가 결혼하기까지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새 가정을 이루었으니 그 기쁨을 이르는 비유일 것이다.


아름다운 계절, 새 출발을 하겠다고 청첩장이 날아든다. 낮에는 햇빛으로 밤에는 가로등 불빛으로, 빛 가운데에서만 자란 곡식들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우리 삶이 어찌 밤낮 햇빛처럼 밝을 수만 있을까.  어디 깨뿐일까, 콩이, 팥이, 사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하다. 가정은 깨가 쏟아지는 곳이 아니라 깨를 만드는 곳이라는 아버지의 주례사가 이 시간까지 마음을 울리는 이유이다.

.

.

.

@적상면 포내리, 2013


매거진의 이전글 [포토에세이] 엄마는 정말 애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