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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수 May 04. 2023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일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일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틀어주는 비디오로 <빌리 엘리어트>를 처음 봤다. 그 시절엔 그저 수업을 하지 않고 영화를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설레어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영화 자체에 집중해서 본 건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담은 로드무비 같았다. 남들이 다르다고 여기는 길이래도 내 길이라면 그리로 향해 갈 수 밖에 없다고, 마침내 성공한 발레리노가 되어 날아오르는 ‘빌리’처럼 언젠가 나도 날아오를 수 있을는지 그려보며 설레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 조금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빌리의 아빠’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의 ‘광부 대파업’을 배경으로 한다. 빌리의 아빠는 탄광폐쇄에 맞서 투쟁하는 광부 노동조합이고, 아빠뿐만 아니라 큰 형과 마을사람들까지 모두 그 투쟁에 온몸을 바치고 있다. 이 투쟁의 와중에도 동료들을 배신하고 현장으로 출근하는 배신자가 몇 있는데, 이들이 출근할 때마다 노동조합 동료들은 침을 뱉고 욕을 한다. 


  큰 아들과 함께 노조 파업활동에 그렇게 열심이던 아빠는 끝내 막내 아들 빌리가 발레에 재능이 있고 춤을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그 다음 날부터 동료들을 배신하고 출근하기로 선택한다. 길어진 파업으로 땔감 살 돈도 없는 마당에 빌리가 발레 오디션을 보러가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이다. 아빠는 과거 자신이 그렇게 침뱉고 욕했던 배신자 그룹에 끼어 광산으로 일을 하러 간다. 큰 아들을 포함한 노동자 동료들은 빌리의 아빠가 거기 있단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채 배신자들을 향해 달걀을 던지고 욕을 퍼붓는다. 그 모욕의 시선과 비난의 야유를 짊어지느라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인다. 자신의 자긍심이던 노조와 동료들을 지상에 남겨둔 채로, 아빠는 지하의 어두운 갱도로 내려간다. 이 장면을 보다보면 도대체 부모가 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 책임감의 무게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빌리의 아빠가 눈에 들어온 다음에 <빌리 엘리어트>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극 초반부터 울컥할 수밖에 없다. 아빠가 얼마나 광부 대파업에 열과 성을 다하는지가 드러나는 장면들을 보면서다. 그 시점의 빌리 아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결말까지 봐버린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저렇게 소중히 여기던 가치와 동료들을 이내 버리게 될 것이라는 걸.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고 평생을 바쳐 지키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빌리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곧 자기 손으로 애써 밀어내리란 걸 말이다. 


  운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 정도 책임감을 가진 아버지가 없었다. 빌리의 아빠가 마주한 갈림길은 신념이나 동료 같은 숭고한 가치이기라도 했지. 부끄럽게도 나의 아버지가 마주한 갈림길은 그런 거대한 이념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납득이 가질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자식에 대한 책임감마저도 다 버려버린 것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결론내린 건 자존심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소위 말하는 ‘간지나지 않는 직업’으로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나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설익은 원망이 독기를 뿜던 시기에도 차마 어린 시절에 받았던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특히 나는 아버지에게 넘치게 예쁨 받았던 첫째 딸이었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그를 저편으로 자꾸만 밀어냈으리라고, 이 제와 그렇게 짐작할 따름이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 대신에 엄마와 친척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먹고 나름의 균형감을 찾은 내가 비로소 마주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그래서, 지켜지기는 했을까? 


  자긍심을 지키는 일과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일은 공존할 수 없을 때가 많아서 우릴 자주 시험에 들게 한다. 그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하는 게 옳은지는 저마다 달라질 수 있겠지만, 자신이 제 삶에 부여한 가치와 자긍심을 포기하더라도 누군가의 행복과 안위를 책임지는 것이 더 용감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갈림길에서 용감한 선택을 감행하는 사람이고 싶은데, 책임감에는 주로 밝은 것들 말고 어두운 것들이 따라온다는 걸 알기에 자신이 없어진다. ‘빌리’의 아빠만 해도 그렇다. 고통과 희생을 넘어 모욕과 경멸까지도 감당해야했다. ‘빌리’는 아버지의 책임감 덕분에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지만, 어째 빌리 아빠는 죄다 잃은 것뿐이다. 그럴 때면 나의 아버지가 내게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꽤나 인간적인 선택이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 대신, 아빠 몫까지 나와 동생을 책임진 엄마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엄마는 나에게 기대도 컸고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숨이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고, “자식에게 자기 욕망을 투영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라며 엄마를 대놓고 차갑게 비난하기도 했다. 오로지 자식을 경유하는 욕망만 살려두고 자신의 다른 욕망은 거세한 채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내가 숨이 막혀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엄마가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게 불편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엄마와 크게 다투게 되는 날이면 매번 두려워졌다. 생계와 생활과 양육의 무게에 지쳐버린 엄마가 혹시나 나까지 본인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절망하고 세상을 등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이 두려움이 비대해지는 날이면 나는 밤늦게까지 잠 못 이루다가 급기야 엄마가 자고 있는 침실의 문을 살짝 열어 그녀의 생존을 확인하곤 했다. 간혹 숨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호흡으로 인해 상체가 들썩이지 않으면 나는 가까이 다가가 엄마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고나서야 안심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유아기 때의 단순 해프닝이 아니고 이십대 중반이 훌쩍 넘어서까지 그랬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털어놓자 엄마는 배꼽이 빠져라 웃으며 어이없어 했다. 엄마는 단 한 번도 그런 선택을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고 했다. 나와 동생이 살아있는 한은 우릴 지켜야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진실인지 다짐인지 잠깐 헷갈렸지만, 다 지난 이야기니 상관없었다. 이제 엄마가 여전히 기대하고 욕심을 부리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은데다가, 엄마의 욕망도 시효가 다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욕망의 매개체에서 벗어난 지금은 그 시절 자녀에게 자기 욕망을 투영하던 엄마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홀로 두 자녀의 생계와 생활과 양육을 책임져야 하는 삶이라면 피아의 욕망을 구분하는 것 같이 형이상학적인 작업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얼추 가늠하게 됐다. 엄마가 나와 동생을 책임지기 위해서 원래 본인의 삶에 갖고 있던 자긍심은 삭제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차라리 나와 동생을 자긍심 삼아서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일과 자긍심을 지키는 일이 같은 일이 되도록 믿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에게 이 모든 생각의 변화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지는 않았다. 다만, 어느 명절 이모들과 함께 <빌리 엘리어트>를 다시 보고 귀가한 엄마에게 넌지시 이런 말을 했을 뿐이다. 


  “생각할수록 빌리 아빠가 너무 안쓰럽지 않아? 빌리는 꿈을 이뤘는데, 빌리 아빠는 잃은 것 뿐이야.”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빌리 아빠는 아름다운 빌리를 얻었잖아” 


  엄마는 마치 사과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랗다는 말을 하듯 당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에겐 당연한 말이 아니었다. 그간 나는 엄마가 포기해온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해서 내내 불편했고 아버지가 다하지 않은 책임감에 대해서만 생각해서 내내 슬펐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엄마가 획득한 것과 아버지가 놓쳐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얻었고(물론 우리가 빌리처럼 아름다운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잃었다.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이토록 무용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불행한 쪽은 나보다 그 쪽일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슬퍼하는 대신 그가 책임감을 다했다면 응당 그를 위해 빛날 예정이었던 에너지를 다른 데에 더 쓰기로 결심했다. 비단 자존심뿐이 아니었을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홀로 나와 동생을 책임져온 엄마를 위해, 나와 동생은 아주 오랫동안 최대한 밝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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