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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수 May 04. 2023

당신 혼자만의 감각이 아니다

당신 혼자만의 감각이 아니다.


  나는 정서적 이상 징후의 모든 원인을 유년기 양육방식에서의 결핍으로 귀인하는 프로이드식 해석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 내가 자주 불안증세를 느끼고, 간헐적인 우울감에 시달리는 것이 어린 시절 부모의 양육방식 때문이라면 지금 와서 나더러 뭐 어떡하라는 건가 싶기 때문이다. 부모를 각성시킨 뒤 과거로 함께 되돌아가 유년시절을 다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괜히 부모에 대한 원망만 커질뿐더러, 이쯤 나이 먹고도 부모를 원망하는 내가 좀 후지다는 생각이 들며 자괴감에 빠져드는 건 싫다. 결정적으로 이런 원망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데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이미 벌어진 문제라서 현재의 내가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 말처럼 들려 더욱 무력해질 뿐이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게 좋다. 어린 시절에야 약체로서 부모의 돌봄에 의탁된 객체일 수밖에 없다지만,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미완을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내가 앞으로 어떤 설렘이나 기대를 안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내 현재의 미완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과거의 부모가 아니라, 현재의 나였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빅 리틀 라이프> 8회에 김소연 시인을 모시고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고 대부분의 문장들이 인상적이었지만, 가슴에 탁 하고 날아와 박힌 부분이 있다. 김소연 시인은 자존감이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 때,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존경하고 좋아하는 어른들을 만나러 간단다. 어른들 앞에서 짐짓 ‘저는 너무 형편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라고 어리광을 부리면 그들은 ‘그렇지 않다’며 시인에게 칭찬을 퍼부어준다. 그러면 시인은 돌아오는 칭찬의 말들을 몇 번이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자존감이란 타고난 축복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쟁취해야 하는 문제기이도 때문에, 타고난 축복이 크지 않은 사람들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할 수 밖에요. 인간의 유년기가 완벽하기란 쉽지 않고, 그 당시 훼손되었던 것들은 유년기 때부터 채워야하기 때문에 이렇게 다소 유치한 방식이래도 어쩔 수 없어요.” (정확한 멘트 확인 필요)


  나는 이 말에서 아주 큰 위로를 받았는데, 한 사람의 유년기가 어떠한 결핍도 없이 완벽하게 지나가기란 쉽지 않다는 확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년기의 결핍을 회복하는 방식이 남들 보기에는 좀 유치해도 괜찮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은 본인이 미완의 유년기를 보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내겐 너무도 멋진 어른이 되어 눈앞에 실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미완의 유년기를 보냈을지언정 그럴듯한 어른이 될 수 있는 건가 하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점쳐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던 희망이었다. 그 좁다란 희망을 내가 쟁취해낼 수 있는 지와는 별개로 가능성 자체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빅 리틀 라이프> 7회는 ‘대놓고 얘기 한 번 해보자, 나 우울하다고!’라는 제목으로 저마다 각자의 우울에 대해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7회가 방송된 후, 청취자로부터 꽤 많은 메일을 받게 되었는데 내가 느낀 기분과 유난히 결이 비슷했다. 


  "저는 저만 그런 생각하며 사는 줄 알았어요."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좀 덜 외롭네요." 

  “이렇게 타고난 사람들이라지만, 살다보면 우리도 다 잘 살 수 있겠죠?”


  제작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성취감을 느꼈다. 딱 이런 반응을 원했기 때문이다. 우울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당신 혼자서만 조울의 폭포에서 후룸라이드를 타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빅 리틀 라이프> 제작을 명분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며 증명 받고 싶었던 명제이기도 하다. 


  운이 좋게도 나는 7회를 방송으로 내보내기 몇 주 전, 인터뷰를 통해 이 사실을 먼저 확인할 수 있었다. 낮에는 멀쩡하게 사회생활 잘 하고 있는 사람이 방에 밤에는 방에서 침대보를 붙들고 남몰래 오열하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중·고등학교 때 전교회장만 도맡아 했을 것 같은 ‘타고난 핵인싸’도 학창시절에 따돌림을 당한 상처가 있었다. 사계절의 변화를 온 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때마다 쉽게 우울해지곤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남들에겐 ‘멘탈 좋다’는 칭찬을 받는 사람이 속으론 숨쉬듯 자연스럽게 ‘죽고싶다’는 충동을 매순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이런 특성이 대체로는 그늘이나 약점처럼 여겨지니까 모두 쉬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빅 리틀 라이프>에서 대놓고 물어본 것이다. 너는 우울하지 않느냐고, 언제 유난히 우울해냐고, 그럴 때면 어떻게 헤어나오냐고, 혹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터놓고 하는 편인 나조차 인터뷰라는 명분이 없이는 친구들한테 저런 질문들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뭐랄까, 서른이 넘고서도 공공연하게 우울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게 좀 유치하고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응당 십대에 사춘기를 떠나보내면서, 혹은 후하게 쳐줘봐야 이십대 초중반에는 반드시 끝내야 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우울감을 드러내는 것은 구태여 처량함을 만들어내 그 안에 잠식당하고 마는 나르시스트와 다를 바 없이 하찮아보였다. 하지만 이런척 저런척 해보아도 나는 기어이 몇 달에 한 번씩은 꼭 우울감에 빠져 죽음을 상상하고 만다. <빅 리틀 라이프> 7회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그러니 우리 이런 스스로를 한심해하는 대신 기억하자. 동족은 어디에나 있다. 자긍심까지 갖기는 어려워도 동족의 존재만큼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언니가 먼저 <빅 리틀 라이프> 이야기를 꺼냈다.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은 기간 동안 나는 언니의 근황조차 들은 적이 없는데, 언니는 방송을 통해 내 생각과 감정의 나체를 전부 목격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화제를 돌리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일었다. 하지만 나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언니는 급기야 인상 깊었던 회차들을 차례대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7회인 ‘대놓고 얘기한 번 해보자, 나 우울하다고!’를 언급하더니 잠시 주춤했다. 언니는 7회를 듣고 너무 깜짝 놀랐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속으로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지레 짐작했다. ‘이런 주제로 한 번도 이야기 나눈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역시 언니도 죽음과 우울을 자주 생각하는 동족이었군.’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가면서 ‘죽고싶다'고 생각해본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너무 깜짝 놀랐어.”


  나도 너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언니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아예 없어?”

  “응 생각해보니까,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거 있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움을 표하는 언니를 보며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말이다. 예전이었다면 언니의 그 말을 듣고 조금은 쓸쓸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나도 그녀처럼 타고난 우울이나 죽음에 대한 상상 같은 건 락스로 흔적도 없이 박박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족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어쩔 수 없이 주름 잡힌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안다. 


  무능한 나는 이런 사람들의 우울감을 덜어줄 수 있는 신묘한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에게 그것이 당신 혼자만의 감각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누구 한명이라도 안온한 밤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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