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시리즈
퇴근길, 사무실 근처 마트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맥주가 싸길래 또 아무 생각 없이 16캔이나 구매해 버렸다.
버스에서 내려, 이 무거운 걸 들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려야 하기에 벤치에 앉았다.
존재는 알았지만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그 벤치.
늘 어르신 두 세분이 길도 건너지 않으시고 사람들만 바라보며 앉아계시던 그 벤치.
그래서 거기에 앉으면 안 될 것만 같았는데, 그날은 마침 어르신 한 분만 계셔서 앉아봤다.
"뭘 묵어서 그래 키가 큰교?"
"네.. 저요?"
"야야. 뭘 묵어서? 우리 아는 키가 작아서 멸시를 받아.. 내 맴이 안 좋지. 뭘 맥였어야 할까 싶은데.. "
그러고는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내가 올해 아흔이 넘었는데, 살아보니까 그 말을 알겠습디더.
빚 먹고는 살아져도 나이 먹고는 못살겠습디더.
내가 빚을 지면 갚으민 되고 받을 게 있으민 기다리민 되는 거라.
근데 나이 먹고는 못살아져. 아파도 병원도 못 가, 써주는 데가 없어가 돈도 못 번다 아입니까..
나이는 그냥 먹는긴데, 먹을수록 못살아지드라니까.."
마음이 울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고, 어째요, 어째요.." 이렇게 맞장구 쳐드리는 것뿐.
95초였던 빨간불이 어느덧 7초가 되고 초록불로 바뀌었다.
"어르신, 저 가볼게요, 신호가 바뀌어서요!"
"그래, 빨리 가보이소!"
몇 날 며칠이 지났지만, 그 어르신의 옥구슬같이 반짝이던 그 눈빛이 잊히지가 않는다.
오늘은 뵐 수 있을까..
신호가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바뀔 때까지 어르신의 얘기를 듣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