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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 바닥에 누우시면 안 돼요!!

by 심쓴삘

퇴근길이었다.

오랜만에 정시에 퇴근하고 지하철까지 바로바로 갈아타서 20분 만에 동네에 도착했다.

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며 치하철 출구를 지나 집에 가다 보니 어르신 한분이 버스정류장 벤치 아래 앉아계셨다. 폰과 담배는 벤치에 두고.


중심을 못 잡고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다 그만 바닥에 누워버리셨다. 만취 이상인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떡해, 어떡해 하면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누군가 119를 불렀겠지, 내가 이렇게 일찍 들어가면 우리 애들이 엄청 좋아하겠지,

이런 생각에 서둘러 돌아서려다,

저분이 몸을 조금이라도 돌려 도로로 떨어지면.. 버스정류장에 들어오는 버스에 치일 수도 있지 않을까..


119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주변 간판을 불러주니 신고접수 됐다고 하셨다.

그때 마침 지나가는 아저씨 한 분이 누워계신 어르신을 흔들어 깨워봤지만, 여전히 인사불성이셨다.


그렇게 7분 후 구급차가 도착했다.

내 신고전화를 받고 구급차가 출발했다고 한다.

신고자는 정말 나 혼자 뿐이었을까..


내가 119에 신고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20년 전 즈음의 일 때문이다.

회식하고 집에 가는 늦은 밤 막차시간 지하철 역 근처에서.

하얀색 짧은 반바지를 입은 젊은 여성이 길거리 벤치 위에 누워 자고 있었다.

내 또래 정도였고, 주변에는 많은 직장인들이 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흔들어 깨워봤지만 몸을 가누지 못했고, 택시라도 태워 보낼까 싶어 택시를 찾고 있는데,

한 남성이 다가와 여성을 부축하려 했고, 내가 다가가니 그냥 도망가버렸다.

그 여성을 다시 흔들어 깨우니,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뜨고는 자신에게 손대지 말라고 화를 내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내가 끝까지 집에 데려다줬어야 했을까, 그 여성은 무사할까, 내가 112나 119에 신고라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정말 많은 후회를 했다.

그 후로 내 힘으로 도와줄 없는 분들을 만나면 119, 112에 신고를 했다.

도로 가운데 누운 어르신, 전동킥보드 1대에 같이 탄 헬멧 없는 중고등학생 3명, 피 흘리며 놀이터에 누워있던 아저씨, 영하의 날씨에 찢어진 오리털파카와 슬리퍼를 신고 길거리 벤치에 앉아계셨던 어르신 등..


신랑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긴 하지만, 참 피곤하게 산다고 말했다.

아닌데? 난 이런 일 막 하고 싶은데?


역시, 오늘은 운 좋은 날이었어.

오늘 그 분이 무사히 집에 가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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