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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Jun 24. 2024

발리에서 달린 일 #1

짧았지만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우붓 논두렁 조깅

생경한 새소리,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논두렁, 비슷한 듯 다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들.

그렇다. 이곳은 늘 나의 조깅 코스가 되어주던 동네 천변도 아니고 옆동네 신도시 산책로도 아니다.

무려 발리!! 그중에서도 우붓!! 발리 안에 있는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지역 중 하나이며 특히나 대자연의 풍경이 멋진 것으로 유명한 곳!!

이런 곳에 왔으니 푸르고 신선한 발리 자연을 맛보며 뛰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유죄다.

날은 조금 흐렸지만 매력적이었던 발리의 논 뷰



사실 여행 준비 단계에서부터 매일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조깅을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조깅 코스를 검색했었는데 3일간의 우붓 일정에서 머무르게 된 우리 숙소는 우붓 시내에서 차로 10여분 정도 거리에 약간은 외딴 장소였기에 주변의 농로나 몽키포레스트 쪽으로 러닝 코스가 있다는 몇몇 러너들의 후기를 봐두었었다. 푸르른 자연을 만끽하며 그야말로 청정하기 그지없는 공기를 맘껏 마시고 내쉬며 러닝을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축복인가. 잔뜩 높아진 기대와는 달리 실상은 안타깝게도 3박 중 1일 차는 늦은 밤 숙소 도착으로 인해 여유가 없었고 2일 차에는 아침부터 많은 비(우기가 아니라 건기였음에도 불구하고)로 인해 강제 방콕을 당했으나 오후에는 그나마 비가 그치면서 수영장 해피아워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일 차가 끝나가면서 보이지 않는 안절부절못함과 마지막 날에는 눈을 떴을 때 폭우가 쏟아지더라도 반드시 뛰러 나가야겠다는 나의 의지를 느낀 걸까.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리셉션에 들러 다음날 아침 7시 러닝 프로그램을 신청해 주었다!!(대부분의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러닝이나 요가, 아쿠아로빅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더라) 여행 가방에 각자의 러닝화와 러닝복을 넣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 나랑 같이 뛰려고 할까 내심 의문이었지만, 한라산 등반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라는 나의 말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아이젠부터 검색하던 3년 전처럼 여전히 내게 감동을 주는 그녀에게 너무나 감사하며 방에 들어가자마자 주섬주섬 러닝화며 모자며 준비하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지난 5월 첫 10k 대회 동반 참가 덕분인지 나의 런생에 조금은 너그러워진 아내(심지어 우리나라 여성의 10k 평균 기록이 1시간 6분이라는 어느 기사를 보고 평균 이상을 기록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겨버림)가 내일 아침에 비 오면 어쩌나 걱정하길래 순간 긴장의 끈을 살짝 놓아버리고는 '우붓에서의 우중런이라니 낭만 넘친다'라는 쓸데없는 멘트를 날리는 바람에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잠들긴 했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아침에 눈을 뜨니 구름이 꽤나 많긴 했지만 군데군데 파란 하늘이 비치며 해가 뜬 러닝 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전날 미리 준비해 둔 러닝복장을 챙겨 입고 무려 자외선 차단 수치 100에 달하는 선크림을 얼굴이며 목이며 팔이며 무릎이며 아끼지 않고 듬뿍 바르고선 로비로 나가니 다행(?)스럽게도 프로그램 참여자는 우리 둘뿐(아내가 조금 걱정했던 게 러닝 프로그램에 다른 참가자들도 많으면 페이스가 높아서 따라가지 못할까 봐). 잠시 후 날렵해 보이는 몸에 길쭉하고 곧게 뻗은 다리를 가진 러닝 잘할 것 같아 보이는 인솔자가 나타났고 대략 5k 정도 코스를 가벼운 조깅으로 달릴 거라는 간단한 소개 후 곧바로 뛰기 시작했다.


발리에서도 특히 우붓은 교통 지옥으로 유명한데 잘 닦여진 넓은 도로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 아주 좁은 왕복 2차선에 온갖 차들과 오토바이가 뒤엉켜 중앙선 구분이 모호할 정도라는 악명을 익히 들었고 이틀간 실제 경험도 했지만 그건 시내 쪽 얘기, 그나마 우리 숙소는 트래픽잼이 심한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곳이었고 이른 아침 시간이었기에 호텔을 나와 약 3~4분간 이어진 도로 옆으로의 러닝 중 차나 오토바이를 많이 만나진 않았으며 인솔자가 앞에서 잘 리드해 주었기에 비교적 안전하게 달릴 수 있었고 5분여 정도 후에는 큰길을 벗어나 안전하고 조용한 주택가 골목으로 진입했다.

살짝 보이는 파란 하늘과 출근길(?) 오토바이



전 세계 어딜 가도 새벽이나 이른 아침 공기가 주는 상쾌함과 신선함은 공통인가 보다. 도로를 벗어나자마자 금방 느껴지는 그 공기에 덜 깨었던 몸이 비로소 완전히 깨어났고 한적한 골목에 규칙적으로 들리는 발소리에 맞춰 호흡도 심박도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아내가 가운데, 내가 후미에서 뛰었는데 왠지 아내의 다리도 가벼워 보였다.(나중에야 들었는데 사실 아내는 인솔자의 페이스가 빨라서 좀 힘들었다고. 약 700 페이스였는데 얼마 전 아내의 10k 대회 기록은 720 페이스였다)

우붓 주택가 골목을 가볍게 달리는 그녀



조금은 구불구불한 주택가를 또 5분여를 더 달리자 양 옆으로 확 트이는 시야에 들어오는 넓디넓은 논.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봤던 논인데 발리 논은 왜 그렇게도 달라 보이던지. 왜 그렇게도 더 특별하게 보이던지. 아마도 여행이 부리는 마법일 것이다. 마침 농로에서는 예초기로 제초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아침 공기에 진한 풀내음마저 더해져 마치 피톤치드와 같은 버프를 받으며 기분 좋은 조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제초 작업을 하던 현지 인부들과 자유롭게 게으른 걸음을 옮기는 현지 댕댕이들을 지나치는 재미는 덤.

여유롭게 거닐던 현지 댕댕이



논두렁길을 10여분 달렸을까.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주택가 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은 넓어진 도로를 달렸는데 도로 양 옆으로 가정집인지 사원인지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대문부터 여느 절의 입구와도 같은 장식이며 처마며 낮은 담너머로 보이는 여러 개의 석탑이 있는 집(?)들을 두 집당 한 집 수준으로 번갈아가며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두 집당 한 집 걸러 대문 앞에는 갈댓잎 같은 걸로 엮은 손바닥만 한 작은 그릇에 밥, 나물, 과일, 과자, 꽃잎 등 여러 가지를 담아 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매일 아침 이렇게 공양하듯 준비하여 신들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란다. 우붓뿐만 아니라 나중에 방문한 스미냑, 짱구, 꾸따 길거리에서도 어딜 가든 가정집이나 가게 앞에서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발리 사람들의 힌두교를 기반으로 한 여러 신들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발리는 신들의 섬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음).



그야말로 발리 스러운 배경을 정신없이 눈에 담고 있는 그때쯤 가운데서 뛰던 아내가 뒤돌아 나를 힐끗 쳐다보며 조금 거칠어진 호흡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무언의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결국 잠시 후 조금 힘들다며 나와 포지션 변경을 요청했다. 인솔자에게 페이스를 조금 늦추자고 말을 할까 하다가 그는 조깅이 시작되고 5분여 정도 후 주택가에 접어들고서부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만의 레이스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고, 평소 승부욕이 강한 그녀(특히 나에 대한 승부욕이 강한 편)가 괜찮다며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겠다고 말했기에 내가 인솔자와의 거리를 약간 두고 달리는 정도로 약간만 페이스를 조절하여 달리기를 이어갔다.


주택가를 나와 다시 큰길, 제법 많아진 차들과 오토바이들을 지나치며 넓게 펼쳐진 논뷰를 보며 7~8분여를 더 달리니 저 멀리 익숙한 숙소 정문의 보안요원과 차단봉(발리에서 규모가 있는 호텔 같은 숙소들은 차량 진입 시에 보안요원들이 거울을 이용한 차량 하부 검색, 트렁크 검색 등 꽤나 높은 보안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음)이 보이기 시작했고 내 뒤에 조금 쳐져 있던 아내에게 숙소가 보이니 거의 다 왔다며 힘을 불어넣어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 20m 정도의 완만한 오르막을 끝으로 호텔 정문을 통과했고 인솔자가 시원한 물을 가져오는 동안 그제야 아내와 나의 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짧은 조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생각보다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해가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전 시간에 뛰었길 망정이지 정말 덥긴 덥더라.


발리에서의 첫 러닝이자 우붓에서의 첫 러닝 기록은 4.5k, 32분, 평균 페이스 7분/km.

사실 내 입장에서 4.5k는 짧은 코스이지만 후기를 쓰다 보니 꽤 긴 글이 된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빼꼼 내비치는 높고 파아란 하늘, 오토바이와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생동감, 푸르게도 노랗게도 펼쳐져 있던 논뷰와 논두렁, 그 주변으로 가득 찼던 풀내음, 약간은 무겁고 습하면서도 자연이 주는 신선함과 상쾌함을 그대로 담고 있었던 공기, 신들의 숨결을 머금은 듯한 고풍스러움과 신성함이 느껴지던 주택가 풍경. 맛집만, 관광지만 찾아다녔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들과 어떻게든 빨라지는 것만이 목표인 것처럼 뛰었다면 맡지 못했을 공기와 내음들.

짧았던 러닝을 이렇게 상세하게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익숙지 않은 낯선 곳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충분히 머리와 가슴에 담을 만큼 여유롭게 뛰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어느 여행지를 가든 가벼운 러닝복 한 벌, 그리고 익숙한 러닝화 한 켤레를 챙기려 한다. 한적한 숲길, 탁 트인 강가나 해변가, 공원도 좋고 도시 한복판이라도 좋다. 여유롭게 달릴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 새로운 장소가 주는 설렘, 여행 중이라는 특별함은 러닝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 러닝이 내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테니까.


굳이 여행 가서 러닝을?? 여행이나 출장 등 낯선 곳에 갔을 때 굳이 달려보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다. 달리면서 느껴지는 하나하나 나열하기 힘든 많은 것들이 걸으면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이라는 것을. 그것은 여행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재미이자 매력 포인트다.


나의 브런치북 첫 번째 글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당신은 러너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조금 특별하다. 러닝을 하지 않는 사람과 구분되어지는 특별한 사람."


나의 브런치북 다섯 번째인 이번 글에서는 이런 말을 남기려 한다.

"여행지에서 달려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특별하다. 여행지에서 러닝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새롭고 소중한 경험을 한 특별한 사람."



ps. 기꺼이 우붓 모닝런에 동참해 준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다음 여행 짐을 꾸릴 때 러닝화를 또 챙기더라도, 여행지 러닝 코스를 검색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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