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강렬했던 레드 크리스털의 추억
나런나닮. 대회의 캐치프레이즈 같은 문구였다.
나의 러닝은 나를 닮았다. 당연한 말 아닌가?? 근데 뭔가 있어 보인다. 참 잘 만들었다.
우리나라에 대형 러닝 대회 붐을 일으킨 선두주자이자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가 뉴발란스가 아닌가 싶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철수를 앞뒀던 뉴발란스를 이랜드 그룹이 인수를 하고 나서 러닝 분야에 사업을 집중하면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도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참고로 나는 뉴발란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아마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믿참뉴발. 믿고 참가하는 뉴발 대회. 서울을 관통하는 짜릿한 코스, 국내 최대 규모의 대회, 혜자스런 굿즈 제공, 깔끔한 대회 운영, 역시나 혜자스런 피니시 후 간식과 이벤트들, 특히나 다른 대회와는 달리 뉴발 대회는 정말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유니폼을 착용하는 일종의 국룰을 지키기 때문에 왕복 8차선 정도는 가뿐하게 메우는 동색 물결(어느 해는 빨강, 어느 해는 파랑)이 만드는 장관 등 여러모로 러너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대회이다. 갑자기 왠 뉴발 타령이냐고??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볼까 이런저런 기억을 더듬다가 나에게 유난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붉은 조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런생에 소중한 크리스털 중 하나인 첫 대회(19년 5월 기브앤레이스)가 나를 러닝의 세계로 단번에 인도한 투명 크리스털이었다면 나를 러닝의 세계에 그야말로 흠뻑 빠져들게 하고 본격적으로 러너가 되고자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인 대회이자 나의 두 번째 대회인 2019년 9월 29일 뉴발란스 런온 서울, 레드 크리스털이 문득 떠올라서다.
첫 대회의 충격적인 임팩트에 취해 있던 상태로 신청한 뉴발란스 러닝 대회. 열흘 가량 나를 괴롭혔던 근육통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그라든 의욕 덕분에 하필이면 다가온 기념일, 어쩌다 예매한 야구장 데이트 등을 핑계로 먹부림만 부리느라 조깅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6~8월을 그냥 흘려보내 버렸다. 9월 중순이 되어서야 러닝 머신 위에 올라서길 겨우 두어 번. 거기에 더해 그야말로 딱 동네 한 바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나 마찬가지로 대회일을 맞이했다. 뉴발 런온에서 기억나는 재미진 일 중에 하나는 대회 장소가 여의도공원이었는데 새벽에 일찍 움직이기 힘들다, 마침 아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는 명분으로 대회 전날 여의도 공원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호텔에 투숙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뻔뻔하고도 게으른 생각이다. 혼자 두고 여행을 간다는 것에 정말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끼는 아내(이런 건 분명 착한 아내병이라고 언제나, 항상, 늘, 누누이 말하지만 10년 넘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 덕분에 편하게 대회 전날 시설 좋은 호텔에 투숙,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초보 아니 아무리 초보라도 저런 생각을 하다니 싶은 재미진 추억이 또 있더라. 거하게 저녁을 챙겨 먹고(메뉴는 분명히 기억나진 않지만) 다음날 대회 준비한답시고 바로 옆 여의도 공원을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에야 10k 대회 정도는 전날 조깅을 7~8k 정도 꽤 길게 뛰어도 큰 부담 없을 정도의 나름 러너가 되었지만 그때는 10k가 마치 풀코스와도 같을 정도로 초보 러너(초보란 말도 허락되지 않을 정도)였었는데 다음날 컨디션을 고려하기는커녕 완전히 망가뜨릴 정도의 거리를 신나게 뛰어버린 과거의 나란 녀석. 심지어 인스타엔 그날 여의도 공원을 뛰었다고 자랑스레 피드까지 남긴 나란 놈. 맙소사 다음 피드를 보니 호텔에 들어가 러닝 머신으로 더 뛰었단다. 낯짝이 너무 뜨거웁다. 평소 러닝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대회에 만 참가한다고 진짜 러너가 된 것 마냥 취해버린 숙취 내음이 아직도 맡아질 정도다. 그렇게 전야제로 거의 10k를 다 뛰어버리고서는 다음날 보무당당하게 출정을 했을 생각을 하니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도 더 이상 키보드를 누르지 못할 지경이다.
대회에 대한 기대와 긴장으로 잠을 적당히 설치고 일어나 주섬주섬 채비를 하고서 행사장으로 향한 나는 여의도 공원 초입에서부터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레드 유니폼을 입은 1만여 명이 이미 공원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식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붉게 물든 공원, 파란 하늘 한가운데 둥실 떠있는 빨간색 대형 풍선(1,2,3 그룹 구분용)만으로 모두의 심박수는 이미 웜업을 마친 상태 정도로 올라 있었고 각자의 투레질을 하며 달릴 준비를 마친 상태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행사가 시작되자 사회자인 노홍철님이 특유의 에너지로 대회장의 아드레날린을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카운트다운 직전 김연아님의 등장으로 여의도 공원은 폭발하고야 말았다.
바로 이런 것이다. 대회의 매력. 출발선에 가득 모인 러너들의 체온과 서로가 맞닿아 있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에너지가 모이고 모여 대회장을 가득 감싸고 더 이상 그 에너지를 억눌러 둘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터지는 출발 신호. 팽팽한 긴장감과 흥분감이 뒤섞여 있다 폭죽과 함께 터져버리는 그 순간,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것도 아닌데 느껴지는 그 충만한 희열감이란!! 그렇게 러너에게 허락된 마약인 대회버프(라 쓰고 대회뽕이라고 읽는다.)를 받으면 무작정 신나게 달리게 된다. 물론 그 약효는 얼마 가지 않아 오버페이스로 인한 급격한 체력 저하라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가져오게 되지만 말이다. 나 역시 생각 없이 대회 전날 10k를 달릴 정도로 런린이 축에도 못 드는 초짜였기에 대회뽕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3k 정도를 다른 러너들의 페이스에 휘말려 정신없이 달려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은 거리는 7k에 숨은 제대로 쉬어지지도 않는 데다 다리는 왜 이리 무거운지. 대회 2회 차 만에 초반 페이스 오버가 얼마나 무서운지 곧바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그때의 나머지 레이스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뛰었는지 어느 지점에서 어땠었는지. 아마 마냥 힘들었을 것이며 어찌어찌 피니시 라인을 어거지로 겨우 통과했으리라. 진심으로 뿌듯한 마무리는 아니었을 테지. 간식이 역시나 푸짐했었고 애프터파티가 있었다던 건 기억이 난다. 영혼까지 털려버려 에일리님, 다듀님 공연 볼 생각도 못하고 집에 가기 급급했던 나놈 진짜 반성하자.
그럼에도 이 두 번째 대회가 런생에 소중한 크리스털 중 하나로 기억되는 건 대회 시작 전 폭발했던 짜릿한 희열감도 있거니와 대회 시작부터 끝까지 러너들이 만들어 내는 물결, 그 넘실거리는 파동에서 느껴졌던 엄청난 에너지 때문이다. 아직도 살짝만 떠올려도 온몸에 전율이 이는 내 런생 명장면 중 하나인 서강대교 위 레드 웨이브.(다른 명장면 중에는 블루 웨이브도 당연히 있다.) 내가 후위 중에 후위에 있었을 테니 아마도 내 눈앞에는 1만 명이 넘는 러너들이 모두 같은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같은 마음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모습이란.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열정, 에너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마치 손에 잡힐 것만 같아서 그 아지랑이를 잡으려 홀린 듯이 계속 달리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광흥창역을 지나 반환점을 돌아 다시 서강대교에 올랐을 때에도 여전히 웨이브는 계속되고 있었고 거기에는 축제까지 더해져 있었다. 요즘에야 워낙에 많은 러너들이 이미 한강 다리를 여러 번 넘나들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한강 다리 한가운데를 걷거나 뛰어서 지나간다는 건 너무나 특별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많은 참가자들이 달리기를 잠시 멈추고 자유롭게 서강대교 위에 멈춰 서서 강바람을 맞으며 한강을 눈에 담기도 하고 연인, 친구들과 서로 인증샷을 찍어 주기도 하는 등 러닝을 하나의 페스티벌로 즐기고 있었다. 지난 대회보다 더 잘 뛰어야 한다는 한심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는 전날의 오버 트레이닝, 레이스 초반 오버 페이스의 여파로 사실 그 멋진 여유를 온전히 즐기진 못했다. 다만 내내 막혀 있던 숨이 뻥 뚫린 서강대교와 시원한 가을 강바람 덕분에 조금은 트였고 아침 녘 햇살을 받아 따사롭게 퍼지는 윤슬이 눈가를 간지럽혀 준 덕분에 주변의 축제 분위기를 어느 정도 맡아내고 담아내어 지금 이렇게 꺼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참여하는 대회 하나하나가 참으로 소중하다. 평소에 하는 조깅이나 LSD(Long Slow Distance), 거리주, 지속주 등 훈련도 당연히 소중한 러닝이지만 그 훈련들의 결실을 확인하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대회이기도 하고 하나의 축제, 레이스 내내 이어지는 응원 열기, 러너 한 명 한 명이 보여주는 열정과 도전 등 대회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많은 것들 때문에 평소에 하는 러닝보다는 대회라는 순간이 더 특별하게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더 또렷하게 새겨지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대회가 아닌 모든 보통의 러닝들도 절대 잊히지 않으려 대회의 순간들과 함께 뭉쳐져서 결정체가 되어 보석함에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요즘의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며 런생으로 세공해 둔 크리스털이 들어있는 큼지막한 보석함을 휘휘 휘저어 보다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어 보고 있는 중이다. 더 꾸준히 런생을 살다 보면 굳이 휘젓지 않아도 손에 덥석 잡히는 날이 오겠지.
나에게와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도 보석함은 있다. 모두에게는 보석함이 있다. 보석함이 하나인 사람은 없다. 어릴 적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보석함, 학창 시절 내가 만든 보석함, 연인이나 배우자와 함께 만든 보석함 등. 그 보석함에는 당신에게 아주 소중한 경험과 추억의 조각들이 켜켜이 쌓이고 다듬어져 만들어진 반짝이는 그 어떤 보석들이 가득할 것이다. 이런 귀중한 보석함을 많이 가진 사람은 행복의 밀도와 부피가 그렇지 않은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한동안 당신의 보석함이 닫혀 있었다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있었다면 지금 당장 운동화를 꺼내어 신고 나가서 달려 보길 추천한다. 책, 영화, 오락, 각종 스포츠, 창작 활동, 사람들과의 만남 등 당신의 인생에 보석이 되어줄 수 있는 것들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달렸으면 좋겠다. 내가 느낀 많고 많은 특별한 경험들을 당신도 꼭 해보길 권한다. 아마 당신에게도 눈이 부시게 빛나는 그것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는 큼지막하고도 매력적인 상자가 하나 더 생길 것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ps. 수년 전부터 차곡차곡 혼자 채워만 오다가 최근 들어 하나 둘 꺼내어 보여줘서일까요? 마침내 저의 그녀도 며칠 전 런생으로 만든 보석함 하나를 드디어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채워 넣은 보석이 너무나 맘에 들어서였는지 벌써 두 번째를 골라놓기까지 했답니다. 앞으로 그녀와 함께 채울 보석함이 새로이 하나 더 생겨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당신도 혼자 런생을 시작하기 어렵다면 주변에 누군가의 그것을 살짝만 보여달라 조르기도 해보고 멀리서 곁눈질로 슬쩍 훔쳐보기라도 해 보세요. 그게 저여도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