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진미 Nov 01. 2021

당신이나 나나, 인생엔 빈틈이 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빙하 위에서 우리는 천천히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다. 걷다 보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크레바스. 누군가는 주저앉아 그곳에 시선을 빼앗기거나 누군가는 나아간다. 크레바스에 동요되는 마음을 추스르고 얼음이 단단해지는 새벽을 골라 크레바스를 건너는 자와, 결국 크레바스에 빠져 칼날 같은 얼음조각에 찔린 채 울부짖는 자. 당신은 어느 쪽일까?


스토리, 영상, 음악, 연출, 연기 어느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다. 오래도록 잊지 못할 영화를 오랜만에 만났다. 내 20대, 30대를 아우르는 최고의 사랑 영화가 '비포 선라이즈' 였다면 40대인 지금 내 최고의 사랑 영화는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이다. 전자가 너무도 현실 같지 않은 아름다운 영화라면. 후자는 너무도 현실 같아 공포감이 느껴진다. 영화를 얼마 전에 처음 보고 그 자리에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쓸 말이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써야 하는지 모르겠는 마음. 생각해 보면 내가 이토록 마음을 빼앗긴 데는 주인공 마고가 나와 비슷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쩜 감독은 연출도 그리 무섭게 했는지... 영리한 감독은 대니얼과 마고를 먼저 보여준다. 첫 만남부터 심장이 간질간질하고 두근거리던 감정에 나까지 연애 감정이 솟구친다. 너무 좋지. 막 시작되는 저 때가, 문득문득 어색해지고, 서로를 의식하고, 별 것 아닌 말에도 빵 터지고...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어. 어..


관객의 메마른 심장에 사랑의 씨앗을 심고 물을 듬뿍 준 뒤에 이제 막 푸릇하게 올라오는 이파리를 감상하고 있는데,,, 자기 결혼했대.... 응? 아니야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영화잖아. 결혼 상대가 몹쓸 인간이면 마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았는데 루가 등장한다. 루.



루.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온화하고 단단한 루. 나는 루의 등장으로 탄식하고 혼란이 가중되기 시작한다. 마고가 그러하듯 둘 사이에서 나는 어찌하질 못한 채 눈물만 흘린다. 루가 나빴더라면,,, 대니얼이 나빴더라면,,,  감정이 휘몰아쳐서 내가 마고가 된 것만 같다. 곰돌이 같은 루는 어쩌자고 저리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건지, 대니얼의 눈빛은 어쩌자고 그리도 깊고 푸른 것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마고도 나도 미칠 지경이다. 2시간 남짓, 내가 지닌 모든 종류의 감정을 다 쏟아 낸 것 같다.


자신의 감정을 어쩌지 못하던 마고는 정서불안 같아 보인다는 대니얼의 말에, 한 줄기 햇살에도 갑자기 울음이 날 때가 있다며 어린아이의 울음에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왜 그렇게 되는지 영문도 모르고, 누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상태, 살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태'인 것 같다고. 누구보다도 잘 알겠는 그 마음.


대니얼과 하루를 보내다가 찾아간 공원의 놀이기구는 둘만의 공간이 된다. 불이 꺼지고 노래는 즐겁고, 놀이기구는 둘의 기분을 업시키며 빙빙 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둘은 온전히 몸을 맡기며 즐기지만 순식간에 불이 켜지고 놀이기구는 멈춘다. 환상은 황홀하고 현실은 뻘쭘하다. 마고는 루를 배신할 수 없어서 울고, 대니얼은 그런 그녀를 지켜본다.


그리고 드디어 루를 떠나 대니얼에게 달려가는 마고. 그토록 원하던 둘만의 왈츠가 시작되고 온갖 환상을 이루며 빙글빙글 카메라는 왈츠를 춘다. 하지만 평생 왈츠만 출 순 없어. 왈츠는 뜨겁지만 짧게 끝이 나고, 황홀하게 꿈까지 꾸며 열망했던 등대 앞에서의 사랑고백은 공허하며 키스는 메말라버렸다.



인생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우며 살 순 없어.



루와 헤어진 마고에게 루의 누나가 말한다. "인생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우며 살 순 없어." 그녀의 말에 마고의 심장근처에서 무언가 툭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아, 어쩌자고 루는 마지막까지 그리도 건강하고 단단하며 변함없는 것일까. 마고의 흔들림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루. 뒤돌아 눈물을 삼키는 마고를 보니 가슴이 미어진다. 마고의 후회도 루의 상처도 모두가 내 것 같다. 잊고 있었겠지만 모든 게 새것이었고, 모든 게 헌 것이 된다.


영화의 시작에서 마고는 머핀인지 케이크인지를 굽는다. 오븐 앞에 앉아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남자가 지나가고 창밖을 보고 있는 흐릿한 남자를 향해 걸어가 뒤에서 안는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나온다. 얼핏 보면 완벽히 똑같은 장면이다. 똑같은 주방에 똑같은 옷, 마고가 남자를 뒤에서 안는 모습까지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반바지의 남자와 긴바지의 남자. 달라진 마고의 목걸이. 반지를 낀 마고와 맨손의 마고. 창가의 책상과 그 위에 놓인 흐릿한 그릇들도 미세하게 다르다. 하지만 이상하지, 마고가 걷는 걸음과 바닥의 카펫들은 완전히 똑같다. 위치까지. 하긴, 그 외의 것들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땅에 발은 딛고 선 내가 나일뿐인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마고는 대니얼과 사랑의 열망을 느꼈던 놀이기구를 찾아간다.

하지만 마고는 이제 더는 환상 속에서 들뜨지 않는다. 그저, 홀로 자조할 뿐.


누군가 당신에게 왈츠를 추자고 손을 건넸고 그 손을 잡았다면, 그 춤은 이제 당신의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엄지 독서클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소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