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핀홀: 용접 중 흡수되는 가스가 응고 과정에서 표면으로 방출되기 위해 발생하는 기공--
싸움을 하고나면 허기가 졌다. 근육을 추스르고 너덜너덜해진 육체로 집으로 들어서면 미친 듯이 공허했다. 철은 문을 걸어 잠그고 책장 앞의 쓰레기들을 와르르 쓸어내렸다. 헐벗은 미녀와 잘빠진 자동차들 뒤에는 헤세와 톨스토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철은 손을 뻗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허겁지겁 <데미안>을 집어 삼켰다. 싱클레어의 알이 매번 깨지는 장면을 보면서도 자신의 알은 한 번도 깨지지 않음에 절망했다. 자신의 세상은 강철로 이루어진 세상. 무슨 짓을 해도 깨지지 않는 무쇠의 세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 줄 근육질의 데미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루한 학교생활은 여전했다. 돌아왔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선배들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실습을 나갔고. 부풀린 취업률이 상황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들은 잠을 자거나 취업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했다. 철도 마찬가지였다. 정학을 선물로 주었다고 다른 아이가 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다른 이들도 쉽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 모두가 제자리 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과학 숙제를 오늘까지 내지 않으면 무조건 0점 처리 하겠다고 협박 하던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점심시간이라 교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대충 끝낸 숙제를 과학선생의 책상위에 놓고 돌아 나오려는 데,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이라기보다는 책에 쓰여 있는 작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들어봤던 이름이었다. 어디서 봤는지 생각하려 애썼다. 저 이름은 어디서 들었더라... 리차드 부라우티건... 누구지? 들어봤는데... 음... 어... 아아! 철은 영감이 말하던 게 기억났다.‘부라우티건이라나? 부라우닌지 부라우슨지 뭔 이름이 그러냐!’ 언젠가 거구의 외국인이 자신에게 주었다던 책에 대해 노인이 지껄이던 게 생각났다. 철은 눈앞의 책을 뽑아 교무실을 나왔다. 운동장 외진 곳에 누워 책을 꺼냈다. 갈색 바탕에 금박을 입힌 테두리. 그 안에는 푸른 수박이 그려있고 <워터멜론 슈가에서>라고 쓰여 있었다. 철은 책을 넘겼다.
재미있는 동화책 같았다. 워터멜론슈거? 수박설탕? 책표지에는 워터멜론슈가에서 사는 사람들의 슬프고 아름다운 얘기라고 소개 되어 있다. 이거 뭐 애들 동화책인가? 이상하기도하고 재밌기도 해서 철은 점심시간과 수업종이 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뭔가 기분이 나쁘면서도 자꾸 생각나는 그런 책이었다. 이거, 일종의 잔혹동화 뭐 그런 건가 봐. 기분이 찝찝해진 철은 책을 뒤쪽 담장으로 던지고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서는 물론 선생님들의 의식에서도 늘 뒤로 물러나있었다. 대등한 녀석들과 싸움을 할 때 만 앞으로 나서는 기분이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세상을 부술 수 없으니 철은 자신의 세상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먼저 부숴버리고자 했다.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모두 부숴버린다면, 어쩌면 마지막에 나를 둘러 싼 강철로 만들어진 이 타원형의 세계를 깰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수업이 시작됐지만 철은 빈 노트를 꺼내 놓고 무언가 생각했다. 혹시라도 또 다시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써지지 않을까하는 기대와 호기심에 노트를 펼쳤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펜을 들고 앉아있었지만 의식은 더욱 또렷한 의식을 불러올 뿐 지난 번 같은 무의식은 오지 않았다. 철은 짐짓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가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은 꾸역꾸역 한 줄을 써냈다.
살고 싶다의 비슷한말은 죽기 싫다라고 생각한다. 죽고 싶다의 비슷한말은 살고 싶다이다.
자기가 쓴 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철은 노트를 찢으며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씨발. 자신이 부끄러웠다.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그것은 쓰레기였다. 잠깐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던 게 염치가 없어 자꾸만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날 리가 없지. 그때의 것은 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줍잖게 읽었던 어느 책에 있던 말이었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철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모멸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