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입: 모재가 녹아 들어간 부분의 가장 깊은 곳과 모재 표면과의 거리--
철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선생님이라는 작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자신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테니 아쉬울 건 없었다. 선생들은 철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철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의 존재자체가 중요하지 않았을 터였다. 제자라는 타이틀로 좋은 대학을 들어가 선생들의 자부심을 드높여 줄 인문계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거는 그런 선생들과는 달랐다.
공고의 아이들은 선생들의 자부심과 꿈 따위와는 무관했다. 그저 아무 곳이라도 취직했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하루 20시간을 일하든, 월급을 받지 못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곳의 아이들은 일거리에 불과했다. 대학을 가기위해 노력 하는 아이들이 꿈이라면,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은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할 서류더미였다. 철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선생이라는 족속들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정학 받은 자신에게 전화를 하고 찾아오기까지 하던 담임이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됐다. 하지만 감동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그런 건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일뿐이다. 그들도 나도 변하는 건 쉽지 않았다. 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인정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철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지금 들어온 수학선생은 어떤가. 저 선생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다. 아이들도 그를 잘 따른다. 하지만 수학선생은 우리를 불쌍해할 뿐이다. 이곳의 선생은 딱 두부류로 나뉜다. 아이들을 불쌍해하거나, 아이들을 서류더미로 보거나. 이곳에 있기엔 아깝다싶은 소수의 아이들에게는 다른 감정을 지닐런지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저들의 감정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철은 자신이 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까 후회스러웠다. 선생이 칠판에 수학공식을 적어 나가자 아이들이 하나둘 눈을 감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모습을 보면서도 선생은 엎드린 아이들의 등위에 대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건 절망이 아닌 용기 였을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대신 정신의 자살을 택했다. 나는 스스로 내 영혼을 조금씩 도려내기로 했다.
철은 연필을 들고 끄적였다. 머릿속으로 노인을 생각하고 투명인간과 수업중인 눈앞의 선생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놀렸다. 하지만 무엇을 쓰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노트에 알 수 없는 글이 쓰여 있었다. 다시 읽어봐도 자신의 손에서 나온 글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철은 옆자리의 선호를 봤다. 녀석은 앞에 교과서를 세워놓고 그 속에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노트에 쓰인 글을 읽었다. 낯설었다. 당황스러웠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신의 손가락을 빌려 쓴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철은 남의 노트를 보는 듯 무심히 그것을 보다가 노트를 덮었다. 이상한 글을 자신이 썼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펜을 내려놓고 여러 번 손을 쥐었다 펴고 기지개를 켰다.
철은 점심을 먹고 담을 넘어 학교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에서 파는 어묵을 하나 사 먹고 거리를 걸었다. 일렁일렁 햇살이 손바닥과 튀어나온 이마를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르게 오갔고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그 뒤를 따랐다. 일찍 끝난 초등학생들이 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뛰는 걸 보다가 같이 뛰었다.
딱히 그 쪽으로 가려고 했던 건 아닌데 어느새 발이 편의점 쪽으로 향했다. 노인은 파라솔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꾸벅꾸벅 느리게 내려온 머리는 반동으로 빠르게 올랐다가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철은 노인의 쭈그러진 육체가 따뜻한 햇살에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인상을 구기며 나왔다. 일부러 시끄럽게 파라솔 주위의 의자를 끌고 쓰레기통을 탕탕 소리 내어 비웠다. 그 바람에 노인이 잠에서 깼다. 그의 표정은 마치 물속에서 막 눈을 뜬 늙은 물고기 같아 보였다. 노인이 처음 보는 세상인 양, 빈 입을 뻐끔거리며 허공을 두리번거리자 아르바이트생은 다시 한 번 우당탕 소리를 내며 주변을 정리하곤 모른 척 안으로 들어갔다.
철은 편의점에서 콜라를 두 개 사서 노인이 앉은 파라솔로 향했다. 하나를 노인 앞에 던지듯 내려놓고 드르륵, 소리 나게 의자를 빼고 앉아 벌컥벌컥 마셨다. 눈을 뜬 노인이 햇살에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냐 술이냐?
-나 학생이거든?
-이 시간에 학교 안 가는 학생도 있냐?
노인이 콜라를 손에 쥐었다.
-상관 할 일 아니잖아.
-미친놈.
노인의 말에 철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미친 게 누군데 나보고 미쳤대!
그렇지! 맞지 맞어. 큭큭큭. 영감은 웃겨 죽겠다는 듯이 꺽꺽댔다. 철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며 노인을 노려보았다. 노인이 탄산에 괴로운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는 모습을 뚫어지게 보다가 입을 뗐다. 그거 뻥이지? 노인은 축 처진 눈꺼풀을 치켜 올리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끄어억- 길게 트림했다. 철이 신경질적으로 다시 말을 뱉었다.
-그거!
-뭐? 끄어어어어억-
-마탄잔지 양탄잔지 뭔지. 그 거 해봤다는 거.
노인은 아하, 라고 말하는 것처럼 소리 없이 입을 쩌억 벌렸다.
-안 해봤으면 내가 어찌 알고?
철이 입을 삐죽거리며 웅얼댔다.
-티비에서 본 거겠지.
캔을 만지작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몸을 옆으로 기댄 체 철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더니 이제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철의 코앞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어디보자... 그래 더 알고 싶은 게로구나?
-뭘! 내가 뭘!
철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올라가자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뜨거운 심장 깊이 칼을 박아 넣는 기분을 너는 모를 거다. 순전한 죽음 말이다. 눈을 가리고 단칼에 끝내야 하지. 그래야 고통이 없다. 그건 제를 지내는 것처럼 신성하고 경건한 행위란 말이다.
노인의 말에 철은 어쩐지 구역질이 나는 것처럼 속이 느글거렸다. 원포인트 애들과 싸움을 자주 하긴 했지만 그건 철에겐 권투시합과 같은 거였다. 정당하게 상대방의 약점을 가격하는 거였지 그 곳에 비겁한 무기 따윈 없었다.
-뻥치시네!
-그래. 너같이 마구잡이 개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놈은 알 턱이 없지.
-진짜라고?
흔들리는 철의 목소리에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길목에 긴 함정그물을 치고 한곳으로 몰아가는 거다. 다 끌고 올 필요도 없어! 잠수부 한명이 무리의 두목을 함정그물로 유인하는 거지. 그럼 두목을 따라 온 참치 무리가 완전하게 가둬진다.
철이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바보 같은 우두머리 때문에 다 죽는 거잖아.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