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깊은 산

by 민달이

* 흄과 가스: 용접 시 발생하는 미세 쇳가루--


아까부터 산새소리가 나고 있었지만 어느 방향에서 나는 소리인지는 알지 못했다. 철은 노인을 따라 20분전부터 산을 오르고 있었다.

-너는 니가 나쁜 놈이란 걸 알지. 사람들은 그게 진짜 너 인줄 아는 거야. 결국 진짜 나쁜 놈인 게지. 세상을 어지럽히는 나쁜 종자 말이다.

멍하니 딴 생각을 하며 걷던 철이 입을 열었다.

-말하자면 나는 인보일이라는 거로군. 나는 잊혀 진 작품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중이고. 나는 타락했고 더러워.

-뭐라는 거냐. 어쨌건 예술은 원래 더러운 곳에서 생겨나는 거다. 이 쓰레기야.

-누가 누구보고 뭐라는 거야? 지금 영감 꼴이 어떤 줄은 알고 있어?

-멍청한 놈

-와, 어이상실!


둘의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다시 20분쯤 공노인과 철은 아무 말 없이 산을 올랐다. 가끔 푸드득거리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가는 다람쥐나 새들이 보였고 그 바람에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 발에 밟혀 부러지는 나뭇가지 소리, 몰아쉬는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 오갔다. 침묵 속에서 말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에게 느껴졌다. 잠시 멈춰서 물을 한 모금 마시던 철이 물었다.


-전에 말하던 그 책을 어쨌어? 금빛 털을 반짝이는 덩치가 준 책 말야.

-벤슨 말이냐? 송어 잡이 책인지 뭔지, 20페이지쯤 읽다가 돌려줬지. 맨날 송어낚시 얘기만 하길래 난 낚시에 미친놈인 줄 알았지 진짜 미친놈인줄은 몰랐지 모냐.

-그냥 돌려줬어?

-그럼, 도대체 뭔 말인지... 천재 아니면 미치광이가 쓴 책 같다고 했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더라.

-뭐랬는데?

-그 둘은 같은 거라고. 미치지 않고서는 천재가 될 수 없다고. 더 웃긴 건. 그래서 자기랑 내가 이 배에 타고 있는 거라는데 당최. 너는 이게 뭔 소리같냐?

철이 얼굴을 찡그렸다.

-뭐래, 내가 알아?

노인에게 물병을 다시 건네받은 철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래 너는 어땠냐?

-뭐가?

-훔쳤다던 그 책 말이다. 그 건 미친 소리 같지 않던?

-그런 것 같진 않은데...

-그런데?

-나도 몰라. 그냥 생각나는데로 써지른거 같던데. 이상한 말만 잔뜩이고.

둘은 다시 말없이 산을 올랐다. 어제 내린 비로 풀들은 흠뻑 젖었고 나뭇잎들이 바닥에 완전히 들러붙어 있었다. 밟히고 으깨진 잎사귀에서 풀 냄새가 짙게 배어 나왔다.


사람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바스락 소리와 함께 다람쥐 한 마리가 우리 앞으로 지나갔다. 노인이 그쪽으로 나뭇가지를 집어 던졌다. 다람쥐는 빠르게 나무위로 사라졌다. 영감은 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런 놈들이 있지. 쥐새끼 같은 놈.

퉤! 노인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철은 노인이 미친 게 확실하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산이 고요해졌다. 아무도 알아 선 안 되는 비밀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는 듯 산은 숨을 죽였다. 산그늘이 조금씩 멀리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철과 노인의 불경한 접근을 막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산 그림자를 올려다보던 철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괜히 소리쳤다.


-근데 뭘 보여주겠다는 거냐고! 언제까지 갈꺼야!

노인은 계속 걸었다.

-아이씨 진짜! 어디 가는지 말은 해야 할 거 아냐!

노인이 잠시 멈춰 서서 입을 열었다.

-큰 고기가 있었다. 상상도 못 할 거야.

-어디에? 뭐 뭐?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노인은 다시 앞서 걸었다. 철은 내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노인의 뒤를 따랐다. 꼭대기에 거의 다다랐다 싶을 무렵, 노인이 방향을 틀어 비스듬한 길로 향했다. 등산로가 없는 곳이었다. 노인의 휘청거리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아 진짜! 거긴 길이 없잖아!

-다 왔어. 여기야.


조금 더 내려가다 걸음을 멈춘 노인이 아래를 보고 있었다. 철이 그가 있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물에 젖은 나뭇잎 때문에 주룩 미끄러져 중심을 잃을 뻔 했다. 에이씨. 철은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며 걸었다. 노인이 내려다보고 있는 곳은 깊고 둥글게 지대가 내려앉아 있었다. 어쩐지 뉴스에서 말하던 씽크홀과 흡사했다.

-이 속으로 빠진 거야.

-모야! 그냥 씽크홀 같은 거네.

-여기로 빠진 게 분명해. 이쯤에 있었다.

철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산에 물고기라니! 미친 영감에게 장단을 맞춰 준 꼴이었다. 또다시 속았다. 잠깐씩 정신이 돌아오는 온전한 순간의 영감을 믿고 여기까지 올라 온 자신이 한심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철이 불쑥 소리쳤다.

-영감은 미쳤어.

노인이 매섭게 노려보다 철에게 말했다.

-미친 건 너지!

-난 갈 거야. 더 있다간 나도 영감처럼 될 것 같아.

10미터 쯤, 발길을 돌리던 철이 돌아서서 소리쳤다.

-안 가? 진짜 나 혼자 간다!


노인은 철을 돌아보지도 않고 무너져 내린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이쌍 몰라. 갈 거야. 철은 웅얼거리며 산을 내려왔다. 길을 잃을까 두려웠지만 군데군데 산악인들이 표시 해 둔 리본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잔뜩 오므린 엄지발가락이 아파왔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 세웠다. 산의 중반께가 지나자 철의 머릿속에서 홀로 남은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땀범벅이 된 채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문득 노인이 떠올랐다. 철은 불길한 기분에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막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는 모습 뒤로 홀로 서 있던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 영감은 어디 가서도 살아날 영감이라고 철은 생각했다. 게다가 십대인 나보다도 산을 잘 타지 않았던가! 철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젖은 나뭇잎 때문에 발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전 20화19) 근육질의 데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