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어디에

by 민달이


와, 씨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어어, 이러면 완전히 망하는 건데. 누구나 살다 보면 일이 자꾸 꼬이고 나쁜 일이 한꺼번에 벌어지는 상황을 한번쯤은 겪곤 한다.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다가 더 엉망이 되곤 하는 일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게 두 손을 놓게 된다. 그럴 땐 종교가 있든 없든 신을 찾는다. 주여. 신이시여. 부처님. 알라님! 그렇게 우리는 존재하는지 아닌지 모를 신들의 이름을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제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어주세요. 저 나쁜 놈을 벌하여 주옵소서. 나를 구원해 주시옵고!


하지만 어디에도 신의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그 상황들이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며 흐르는 대로 두거나 고통을 참아내는 삶을 살고 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기에 우리를 이리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두는 가 말이다. 당신의 신은 정녕 당신과 함께 있는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나오는 말인데, 그리스 사람들은 신과 비극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절절하여 극 중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그리스 3대 희곡 작가인 소포클레스와 아이소필로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이야기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트로이 전쟁에 나선 아가멤논의 이야기, 운명에 저항했지만 거스를수 없었던 오이디푸스 왕, 자기 자식을 죽이는 메데이아의 이야기들은 그 중 가장 유명한 비극이다. 비극이 등장하는 만큼 이야기는 꼬이고 꼬인다. 누군가는 응징을 받아야 한다. 관객들은 그들의 비극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당시의 카타르시스는 자신의 비극적인 감정들을 극을 보며 풀어낸 것이라고 한다.) 헌데 일은 너무 꼬이고 꼬여 매듭이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 이른다. 아, 이 비극의 결말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면 관객들은 손에 든 빵과 술잔을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이에 작가들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자주 사용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기계장치의 신'. 엉망으로 엮여버린 사건을 한방에 풀어버리는 위대한 신적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극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하늘에서 등장하거나 전능한 목소리가 우웅 우웅 울리며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단번에 구해주고 죽었던 주인공을 느닷없이 다시 살려서 극을 이끌어 나가게 만든다. 뭐 개연성 따위야 상관없다. 어차피 신은 전능하니까. 신은 아무렇게나 삶에 끼어들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위대한 존재니까 말이다. 아침드라마에서 자주 보듯 구박받던 주인공이 알고 봤더니 재벌집 아들이더라, 하는 그런 거.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자면 치트키.


인생의 치트키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 날들이 많이 있다. 영화처럼 우아한 귀족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사실은 널 위해 준비했다며 척하니 거액의 통장을 건네주는 그런 즐거운 상상을 참 많이도 했다. 하지만 나의 삶에 신이 그렇듯 멋지게 등장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뒤통수를 치며 나타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종종 볼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퇴직이라거나, 호흡을 맞추던 회사에서 중간에 연락을 끊어버려 카피료를 받지 못하거나, 예고도 없이 허리가 완전히 나가 며칠씩 누워 있어야만 하는 황당한 상황이 오거나. 아아, 나의 신은 비정하기도 하여라. 나는 틀어진 허리를 움켜 쥔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눈물을 흘려야 했다.


"뭐하시는 분이세요?"

갑작스러운 의사의 질문에 나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계속 앉아만 계시죠? 그러면 안돼요. 큰일 납니다. 허리가 지금 마지막 단계로 가고 있어요."

느닷없는 허리 통증에 병원을 찾은 나는 병증에 관련된 당연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뭐하는 분이냐는 그 물음에 어떤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 깊은 곳에서 조금씩 줄어드는 자존감의 소리가 찌글찌글 들리는 것 같아 기분이 한 없이 가라앉았다. 우울한 얼굴로 진료실을 나서는 내게 의사는 절대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며 무조건 눕거나 걸으라고 했다. 걷는 운동보다 허리에 좋은 건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며 알겠냐고 나를 다그쳤다. 그날 이후로 나는 동네에서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을 걸었다. 낮에 걷기엔 어쩐지 엄두가 안나 저녁 늦은 시간에 몰래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 어두운 밤에 운동장을 돌고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은 말 없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넓은 트랙을 나와 함께 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사람, 음료를 손에 든 사람, 세련된 운동복으로 무장한 사람, 편한 차림의 사람. 간절한 얼굴의 사람, 비장한 얼굴의 사람, 즐거운 얼굴의 사람, 괴로운 얼굴의 사람, 온갖 사람들이 함께 그 신성한 곳으로 모여든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운동장을 돈다. 넓은 운동장은 한 번 돌 때마다 4분.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쯤 돌다가 한 번씩 쉬기 위해 멈춰 서서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달이 밝은 날은 달빛으로 달빛이 없는 날은 가로등의 따스한 빛으로 사람들은 걸어 다닌다. 타원형의 운동장을 끝없이 돌고 있으면 마치 달밤에 신을 향해 경건하게 제를 지내는 제사장이 된 기분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일까? 묵묵히 어둠 속을 돌며 그들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건 무엇일까. 나는 많은 시간 동안 심사위원들이 내 작품에 손을 들어주길 바라며 운동장을 돌았다. 응모했던 단편과 장편의 이름들을 나지막이 되뇌며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밝은 달을 향해 빌었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도 빌었고 기억해 낼 수 있는 모든 신들에게 내 운을 부탁했다. 다른 어떤 존재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한 번 두 번 원하던 소식이 들리지 않게 될 때마다 내 인생에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곤 했다. 당장 어떤 신이라도 좋으니 허허벌판 같은 운동장으로 내려와서 '너에게 선물을 주노라' 외치며 내 꿈을 실현시켜 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비난하며 이런 말을 했지. '이야기의 문제는 오로지 이야기 안에서 끝내야 한다' 맞는 말이다. 내 문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거겠지. 그게 맞는 거겠지. 기계장치의 신을 바라지 말고 내 글이 더 눈에 띄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거겠지. 이해를 하면서도 정신적으로 힘들고 고단했던 나는 이 모든 사태를 단번에 끝내줄 나만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간절히도 바랐더랬다.


하지만 나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40이 넘은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는 동안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삶을 가꾸려 노력하는 사람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성실히 일상을 살고있는 걸 알면서도 나만의 치트키를 간절히 기다리는 건 내 이기심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계장치의 신'의 도움따위는 염두해 두지 않고 스스로 생을 살아가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를 만나게 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게 결국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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