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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과 남자 친구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by Aprilamb

아침에 뉴욕타임스의 스타일 섹션에서 어떤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전문직 여성으로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여 결국 마흔에 마케팅 부서장이 되고 만다. 성과를 위해 팀원들을 강하게 이끌었지만 그들을 다독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기에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 성별의 한계는 존재했고 - 유일한 MBA 출신의 여성이었지만 - 그녀는 끝내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혼생활도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남편을 팀원처럼 강력하게 이끌었으며,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비꼬면서 무능함을 지적했다.(이런 부분은 회사생활과는 조금 달랐음) 회사에서처럼 그녀는 집안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매번 식재료를 준비하고, 주말마다 소파의 위치를 바꾸고, 연휴에 놀러 갈 계획도 빠짐없이 세웠으며, 그 모든 결정은 스스로 내렸다. 가끔은 자신이 혼자 집안을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 정도였다.

업무와 가정 모두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힘에 부쳤지만, 그녀는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신의 목구멍 아래쪽으로 깊이 묻었다. 도움을 원하는 것은 약함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그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대신 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남편은 매번 쥐잡듯 잡았음)

하지만, 결국 그런 생활에 지쳐버린 그녀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가족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운을 낸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관계회복을 위한 시도들은 어색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그녀는 남편과의 12년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렇게 암흑같은 시기를 보내다가 한 미팅사이트에서 어떤 소방관 남자를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과거의 습관을 최대한 누르고,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다시 이전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되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자 친구와의 저녁 약속에 - 회사 동료와 칵테일을 마시다가 - 한 시간 가량 늦고 말았다. 이런 일은 전남편과도 자주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 친구는 불같이 화를 냈고, 그녀는 놀라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말았다. 그날 저녁 남자 친구는 자신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고, 그녀는 평생 처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데...




어설픈 해피앤딩인 이 이야기에서 그녀는 그때 남자 친구가 버럭 화를 내며 '늦으면 연락을 해야죠!' 하지 않았다면 헤어졌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대부분 저런 상황이라면 똑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잘은 모르지만,


'수잔, 조금 더 늦게 오지 그랬소? 혼자 기다리며 당신이 어디쯤 왔을까 상상하는 게 무척 짜릿하거든.'


하고 반응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심지어는 전남편도 같은 상황에서 남자 친구처럼 반응했던 적이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조금 소심하게 이야기했을 수는 있지만.


그녀가 변하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그녀의 남자 친구 직업 때문일 것 같은데, 미국에서 소방관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희한하게 인기가 많고 실제로 전미에서 가장 섹시한 직업 1위로 선정된 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여자들에게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다. 미국 친구와 맥주를 마시다가 문득 생각나서 왜 그렇게 소방관이 인기가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친구의 대답은 간단했다.


'사람들 생명을 구하잖아.'


소방관은 우리나라에서는 불을 끄는 사람들이지만, 마벨 슈퍼 히어로즈를 사랑하는 국가에서는 스크린 밖 실제 세상에서 만나볼 수 있는 슈퍼 히어로인 것이다. 물론 경찰도 비슷한 일을 하긴 하지만, 그들은 배가 나왔으니까.


그녀가 실제로 남자 친구의 한번 버럭에 인생이 바뀐 것이었다면 조금 미안해지겠지만, 아무래도 난 직업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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