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일본 TBS에서 2016년 제작된 드라마로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동시에 채널W에서 방송을 했었죠. 방송 당시 자막뿐 아니라 화면 내의 여러 텍스트까지 성실하게 현지화해서 크게 호평을 받았었습니다. 역시 일본 드라마답게 원작은 우미노 츠나미라는 작가의 동일 제목 만화네요.
일본에는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이 만화인 경우가 꽤 많은 편인데, 대부분 원작의 분위기나 주인공의 생김새 등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일본 사람들 특유 상대방의 영역을 흔들거나 왜곡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인정해주는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만화가들이 만들어낸 아이덴티티를 되도록 왜곡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물씬 묻어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원작의 보존에 너무 신경 쓰다 보니 11부작(드라마)이나 2시간(영화)에 제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 실패하거나, 비주얼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관객이 스토리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유명했던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을 영화화한다고 했었을 때 개인적으로 꽤 기대했었는데, 1장(1장, 2장, 3장 총 3부작으로 제작했음)을 보다가 만화와 너무 똑같아 이상해서 중간에 나와버렸던 기억이 있네요. 말로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보셨던 분들이라면 고개를 끄덕거려 주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본에서는 이런 방식의 제작에 익숙해서인지 3장까지 초대박을 쳤다고 하니 역시 이웃 나라라고 해도 정서적 차이는 지구 반대편의 노랑머리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구나 하게 됩니다.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또 하나 거슬리는 것은 바로 그들의 과장된 행동인데요. 미안하다고 할 때 ‘스미마셍’ 하면서 허리를 90도로 굽히는 것이나, 서로 대화를 할 때도 뭔가 만화 속처럼 정지 화면이 존재하는 것(예를 들면 놀랐을 때 입을 벌리고 양 팔을 좌우로 든 후 '아앗' 이렇게 1초 동안 정지. 같은..) 등이 그것입니다. 잘 모르면 원작인 만화의 컷들을 살리기 위한 연기인가 오해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일본에 가보면 정말 일상생활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말 그러고 있다고요...
너무 서론이 길었는데, 이 드라마는 구직활동에서 번번이 실패하는 고학력 실업자 미쿠리 양이 우연히 독신 샐러리맨 츠자키 군의 집에서 가사 대행 도우미로 일하게 되며 발생하는 사건들을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가사 도우미로 일하다가 그것에 집중하기 위해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는 거죠.
장르는 관계가 진행되면서 점점 지루해질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이긴 하지만, 소재 상 연애의 완성만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의해 또 다른 국면에 진입하게 되어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여러 사건이 실제 사회상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으므로, 재미있게 보면서도 여러 생각을 함께 하게 되기도 합니다. 덕분에 싫증 잘 내는 성격인데도 최종회까지 성실하게 끝마칠 수 있었네요.
물론 일본 드라마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따르기 때문에 악한이나 나쁜 놈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최종회까지 서로서로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일 없이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시청하시는 내내 스트레스받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감상하실 수 있는 것도 장점이겠죠.
사실 각본가의 대본 구성 완성도가 뛰어나 지루할 틈이 없기도 하지만, 남자분이시라면 - 어쩌면 여자분도 - 귀여운 아라가키 유이의 연기에 푹 빠져 다른 단점은 못 보고 계속 끝까지 시청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누가 뭐래도 세계 최고니까요. 드라마 엔딩의 코이댄스(주제가에 맞춰 등장인물들이 추는 춤)신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유이만 추면 안 되나?’하기도 했었는데요.
남자 주인공인 호시노 겐도 - 꽤 유명한 가수라고 하는데 저는 잘 몰랐습니다 - 어설픈 독신남의 연기가 꽤 잘 어울렸죠. 안경 벗은 신에서는 유재석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조금 놀라운 건 미쿠리의 이모 유리 역을 연기한 이시다 유리코가 작품 내 설정과 같이 실제로 49세라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요즘 동안인 사람들이 많다지만 이게 말이 됩니까? 신의 축복이네요.
일본 드라마가 취향에 맞지 않으신 분들도 많겠지만, 바쁜 일상에 찌들어서 뭔가 힐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분이라면 강력하게 추천해 드리고 싶은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입니다.